살지 않은 것 같았는데, 살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날들이 있다.
그런 날들은 늘 유난히 빠르게 지나간다. 시계를 보지 않았고, 특별한 계획도 없었는데 해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창밖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서야, 아, 하루가 갔구나, 하고 깨닫는다. 뭘 했지? 되돌아보면 뚜렷하게 떠오르는 게 없다. 밥은 먹었고, 잠깐 누웠다가 일어났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내려놓았다. 그게 전부인 것 같은 하루.
사람들은 그런 하루를 허무하다고 말한다. 낭비했다고, 아깝다고, 왜 그렇게 보냈냐고.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오면 죄책감이 먼저 찾아왔다. 뭐라도 했어야 하는데,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느낀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날, 머릿속은 더 바빴다. 하지 않은 말들, 미룬 결정들, 아직 시작하지 않은 마음들이 조용히 자리를 차지했다. 며칠 전 나눈 대화가 떠오르고, 내일 해야 할 일이 스쳐 지나가고,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겉으로 보기엔 멈춰 있었지만, 안에서는 계속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날은 몸이 먼저 쉬어가는 날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조용히 요청하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내려놓고 있는 중인 날.
우리는 너무 쉽게 성과 없는 하루를 실패로 규정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무너지지 않았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기에 다음 날 다시 움직일 힘이 남았다. 그 하루가 없었다면, 다음 날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루가 그냥 지나갔다는 사실이 때로는 두렵다. 이렇게 흘려보내도 되는 걸까, 하는 불안이 스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지나간 하루들 덕분에 나는 아직 여기 있다. 무너지지 않았고,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멈춘 것처럼 보였던 날들이 사실은 나를 붙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하루가 와도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려 한다. 아무것도 못 했다고 자책하는 대신, 오늘은 그런 날이었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하루를 비웠기에 내일을 채울 수 있다고, 조용히 믿어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가 지나 있었다는 문장은, 어쩌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에, 하루를 무사히 건넜다고.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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