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을 달려온 끝에서, 처음으로 방향을 묻다
멈추니까, 비로소 보였다
정리를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책상 서랍 하나를 비우는 일이었다. 오래된 수첩과 몇 장의 생산 계획표, 이미 지난 납기 날짜가 적힌 종이들,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보관해 두었던 영수증 몇 장. 그저 버리면 되는 것들이었지만,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종이 위에 적힌 숫자들은 이미 지나간 시간들이었고, 그 숫자들을 붙잡고 있던 내 손은 아직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알았다. 지금 내가 정리하고 있는 건 물건이 아니라, 지나온 삶의 일부라는 것을.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낯선 공기와 익숙하지 않은 언어, 공장 안을 가득 채우던 재봉틀 소리. 사람들은 나를 보고 책임자라고 불렀고, 나는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납기를 걱정했고, 누군가는 인원을 걱정했고, 나는 그 모든 걱정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는 늘 바빴고, 하루가 끝나면 내일이 더 급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일이 곧 나라고 믿게 되었다. 공장이 돌아가면 마음이 놓였고, 문제가 생기면 숨이 막혔다. 삶의 중심이 아니라 삶 전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공장을 정리하고 있다. 사람을 정리하고, 라인을 정리하고, 창고를 정리하고, 남아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접어 상자에 담고 있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했다. 마치 긴 시간 동안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선 사람처럼, 숨이 고르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동안 나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았고,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고, 멈추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쉬지 않았다. 쉬는 법을 몰랐다.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선택이라기보다는 삶의 흐름에 밀려 들어간 일이었다. 그때부터 인생은 단순해졌다. 해야 하는 일을 하고, 맡은 자리를 지키는 것. 그렇게 하루가 쌓였고, 한 해가 쌓였고, 어느새 수십 년이 지나갔다. 그 사이에 공장이 무너질 위기를 겪기도 했고, 사람을 잃기도 했고, 다시 일어서는 순간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늘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는 언제 멈추고 싶은가. 질문할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현실은 늘 빠르게 움직였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선택보다는 대응이 먼저였고,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였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40년이다.
베트남을 정리하면서 처음으로 시간이 느려졌다. 급하게 계산할 것도 없고, 당장 처리해야 할 생산 문제도 없고, 오늘 인원이 몇 명 빠졌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듯한 감각이 올라왔다. 불안도 아니고, 후회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상태였다. 나는 그 감정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살았던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달려간 것이 아니라, 눈앞의 상황을 버텨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는 말은 맞지만, 방향을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일이 나를 이끌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갔다. 그게 삶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리는 속도를 멈추게 한다. 멈추면 보인다. 보이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이 질문이 조용히 마음에 자리 잡았다. 공장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올라온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살아도 되는 걸까. 그 질문은 단순했지만, 무겁게 다가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누군가의 일정 속에서 살았다. 납기와 생산과 비용이 나를 움직이게 했고, 거래처의 전화가 하루의 방향을 결정했다. 지금은 그 일정에서 벗어나 있다. 처음으로 내 시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방향을 고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시간은 의미가 있다.
베트남을 정리하면서 나는 공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돌아오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빠르게 가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많은 것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방향을 생각하면서 걸어도 된다. 직장생활의 끝은 실패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다. 이건 다른 시작의 입구다.
나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처음으로 나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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