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셋과 함께 살게 된 이야기
이렇게 살 줄 몰랐다. 내가 삼형제의 엄마가 되어 살 것이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늦게 결혼해서 뼈대가 튼튼한 첫째 아들을 낳은 것도 힘들었는데 2년 터울로 줄줄이 아들이라니. 맙소사!!! 둘째를 낳기 전에는 엄마가 아시는 스님께 여쭤본 후, 여동생을 본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 내심 안심하고 기다렸다. 산부인과 진료를 보러 간 어느 날, 의사 선생님께서 초음파 사진을 가리키시며 “첫째가 아드님이죠?” 하며 웃으셨다. ‘아니, 첫째가 아들인 걸 아시면서 왜 그러실까,’ 왠지 불길했다. ”네……그런…. 데… 요?”하고 대답하자, ”아유, 얘는 너무 잘 보여줘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하시는 것이다. “네? 저게 뭐예요?” 하며 나는 눈을 비볐다. ‘세상에나, 설마?’
둘째가 들으면 엄청나게 서운해할 일이지만, 사실은 둘째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날, 병원 옆 공원을 몇 바퀴를 돌며 팔자 탓을 했는지 모른다. 딸일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고 태명도 가인이라고 지었던 아이다. 어째 이런 일이? 이럴 줄 알았으면 민간에 내려오는 신통하다는 방법이라도 써보는 건데, 이미 늦었다. 나는 그렇게 아들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아들 아들 엄마라니!, 이제 내 인생에 더 이상 아들은 없다’ 라며 살고 있었는데, 덜컥 셋째가 생겨버렸다. 친정 엄마는 “아들 많은 집에는 원래 딸이 귀하다는데, 아무래도 얘도 아들일 것 같다.”라며 조심스럽게 얘기하신다. 남편은 시댁에서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넷째로 딸을 낳으셨다. 엄마도 딸이 있고, 어머니도 딸이 있는데, ‘아, 나는 어쩌란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왕 셋이라면 딸 둘에 아들 하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셋째 아들이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엄마의 말씀처럼 셋째가 아들일 거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지만, 나는 그래도 1%의 가능성을 부여잡고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내 생에 딸이라는 귀한 선물일지.’라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 5%쯤은 묘한 갈등이 생겨서 급기야 엄마가 아시는 스님께 전화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내가 살생을 허락하지 않는 불가에 귀의한 스님께 전화를 드린 건 무엇이겠는가?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을 작정이었던 게지. 지금 생각해도 그건 내가 했던 일 중에 참 잘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웬걸, 셋째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가 설날 명절쯤이었는데, 몸이 안 좋아 조금 늦게 시댁에 내려간 후 시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시어머니 세대에는 ‘낙태’라는 것이 참 쉬웠던 모양이다. ‘지운다’라는 말을 입에 올리셨던 어머니는 내가 건강한 막내를 낳고 나자, 눈물을 펑펑 쏟으시면서 ‘아가한테 너무나 미안하고, 에미한테 너무나 고맙다.’고 하셨다
예쁜 얼굴에 작은 체구로 내 뱃속을 쑥 빠져나온 둘째와는 달리 막내는 생긴 것도 다르고 나오는데도 참 애를 먹었다. 뱃속에서 한 번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를 아기를 위해 나는 분연히 ‘엄마가 너를 꼭 건강하게 키워서 밝은 세상 빛을 보게 해 주마.’라고 다짐했었다. 뱃속이 너무 편했는지 셋째는 잘 자라 마지막 달에는 의사 선생님이 아기가 너무 크다고 걱정을 하실 정도였다. 게다가 분만예정일에 남편이 해외 출장 중인 것도 문제였다. 셋째 아들인데, 그것도 혼자 낳아야 하냐며 투덜대는 마누라를 위해 남편은 회사에 통사정을 했고, 다행히 회사의 허락을 받아 남편만 비행기 시간을 당겨 귀국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느긋한 건지, 그 안이 편안한 건지 도대체 아기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 후 유도분만을 하기로 결정했다. 남편이 일주일을 아무 소식 없이 출근하는 동안, 직장 동료들은 연신 ‘나왔냐?’고 물어보며 궁금해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나온 셋째이다.
4킬로가 넘는 떡대 같은 체구로 산도를 빠져나오느라 눈의 실핏줄이 터지고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갛고 시꺼멓게 된 우락부락한 아기를 보시고 엄마는 할 말을 잊으신 듯했다. “아니, 우리 집엔 이런 애가 없는데…”, 하시다가 곧 “이렇게 생긴 애가 클수록 인물이 좋아진다.’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셨다. 그 웃픈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도 가끔 엄마는 막내를 보고 웃으시면서 “너는 특별히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라고 하신다. 손주보다는 당신의 딸이 더 귀한 우리 엄마는 셋째 아들을 낳은 딸이 참 대견하셨던 모양이다.
여자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기를 낳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가 있나보다. 막내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14년이 넘어가는데, 글을 쓰는 자리를 빌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감회가 새롭기 그지없다. 그와 더불어 첫째, 둘째가 내 품에 오던 날의 기억까지도 여전히 생생하다. 둘째 때는 딸이 아니라고 낙심했었지만, 셋째는 어련히 아들이겠거니 하다 보니 더 서운할 것도 없었다.
남편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노후 생활비를 걱정하는 중에도 나의 막내 사랑은 지극해서 나름 애정을 듬뿍 담아서 키운 것 같다. ‘내가 세 명의 생명을 잉태했었고, 이 아이들이 나의 몸을 빌어 이 세상을 만났으며 지금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정말 위대하고도 신비로운 엄마라는 인간의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아들 키우는 엄마가 딸 키우는 엄마보다 인당 2년은 생명이 단축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라지 뭐. 그러니 나는 내 건강이라도 더 챙겨야지.’ 하면서 오늘도 냉장고에서 비트 주스를 한잔 꺼내 마신다. 콧수염 숭숭 나고 키가 나보다 훌쩍 커버린 아들 셋과 함께 오늘도 지지고 볶으며 씩씩하게 살아가기 위해.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처럼’ 인생은 예기치 않게 잘도 흘러간다. 올망졸망한 아들들을 데리고 참 복작복작 잘도 살아왔다. 나는 아들 셋으로 엄마 인생의 첫 테이프를 끊었지만, 중년이 된 지금도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걸 두려움이라고 해야 하나 기대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수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기도 하다. 오늘 지금은 한가한 토요일 오전, 어제까지 시험으로 피곤했을 둘째 녀석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쿨쿨 잘도 자고 있다. 곧 ‘일어나 밥 먹어라’라고 소리를 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