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유언에서 시작된 기다림의 서사

CONCEPT 손자병법_작은 것의 화려한 반란

by dkb 하우스

> CASE1: 사마가문, 유언에서 시작된 기다림의 서사


[Overview] 시계는 시간의 영원함과 반복성을 담은 공간 예술의 기하학입니다. 시계 바늘은 현재를 향해 영원히 달리면서 미래를 과거로 양분 시킵니다. 시계는 반복을 되풀이하며 그 자리를 돌고 있지만 이것은 시간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연속이 미래가 되듯 기다림으로 미래를 준비해 나가면 그 시간은 반드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야구 경기에서 클린업맨(Clean up man)으로 불리는 4번타자의 끝내기 홈런은 위용이 넘치는데 사마가문(司馬家門)도 이와 유사한 극적인 역전승을 펼칩니다. 사마가문의 1번타자인 사마담(司馬談)은 사관으로 아들이 어릴 때부터 고전을 익히고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가 집필하던 역사서를 완성할 것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사마가문의 2번타자가 된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90년)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수많은 국가장서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기원전 104년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친분이 있던 장군을 두둔하게 되면서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고 사형, 벌금, 궁형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과중한 벌금을 낼 수 없었던 사마천은 사마가문의 빅픽처를 이루기 위해 궁형을 선택하여 목숨을 건집니다. 그가 궁형의 치욕을 딛고 20년만에 완성한 사기는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무제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는 역사서로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구성된 총 130편의 대작입니다.


사마의(司馬懿, 179~251년)는 사마가문의 3번타자로 조조가 승상이 되면서 그의 부하가 됩니다. 조조가 사마의를 경계하고 싫어하면서도 그를 중용한 것은 삼국지 최고의 지략가인 제갈량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증명하듯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6번이나 막아내며 삼국지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제갈량과의 마지막 전쟁을 장기전으로 맞서면서 제갈량이 지병을 얻어 폐렴으로 사망하였고 이로써 사마의가 승상에 올라 위나라가 사마가문의 차지가 됩니다. 그리고, 사마가문의 마지막 주자인 사마염(司馬炎, 265~290년)은 사마의의 손자로 280년 길고 험난했던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끝내고 마침내 통일 제국인 서진을 건국하며 사마가문의 승리에 쐐기를 박습니다. 사마가문이 중국 역사의 중심에 서는 데는 그들이 견뎌낸 시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열매가 익듯 지혜를 다지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계 바늘은 현재를 달리면서 미래를 과거로 양분시킨다. 시계는 반복을 되풀이하며 그 자리를 돌고 있지만 이것이 시간의 미래다.


> CASE2: 정조(正租),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Overview] 숙고의 노력으로 이룬 결과는 천지를 움직일 만큼 파장을 일으킵니다. 100미터 육상에서 10초의 벽을 깰 수 없다는 게 의학계의 정설이던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미국의 짐 하이스가 9.95초를 기록하며 환호합니다. 하지만 TV 생중계는 그의 말을 담을 수 없어 모두의 궁금증을 유발시킵니다. 그에게 10초의 벽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는 10초를 벽과 같은 한계로 보지 않고, ‘하느님! 저 문은 닫혀 있지 않았군요’하며 직접 본질을 열어 깨운 것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정조(正租, 1752년 ~ 1800년)처럼 어려운 역경을 딛고 국왕이 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11세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직접 보아야 했고, 무려 13년간 묘소에 참배도 할 수 없었으며, 반대 세력으로부터 수많은 음모와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고,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1776년 3월 10일 24세의 나이로 조선 22대 국왕에 등극하게 됩니다. 경희궁 수정전에 모인 조정의 대신들은 사도세자의 죽음 그리고 정조 불가론과 관련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조정 대신들 앞에서 정조는 본질로 천명합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그렇게 자신이 계획한 정치 개혁을 과감하게 단행합니다. 정조의 강한 개혁 의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집결체가 수원 화성(華城, 1794 ~ 1796년 축조)입니다. 그의 개혁 의지가 한양 중심의 노론 기득권으로부터 저항을 받게 되자, 수원에 이를 시험할 수 있는 개혁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정조의 정치 개혁은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주민들을 팔달산 일대에 살게 하면서 개혁도시를 만들어 갑니다. 동양의 이상적인 국왕으로 불리는 중국의 요임금은 군사론을 바탕으로 정치에서 성과를 이루었는데, 정조는 요임금을 이상적인 국왕으로 여기며 화성을 요임금이 만든 수도와 같은 공간으로 디자인하고자 했습니다. 정조는 일사천리와 용맹함을 통해 군사도시 상업도시인 수원 화성에 개혁정치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됩니다.

숙고의 노력으로 이룬 결과물과 숙고의 말은 천지를 움직일 만큼 파장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