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연히 나란히 여행하다
아내가 끝물이라며 파는 천도 복숭아를 마트에서 사가지고 왔다. 봉투 속의 과일은 모양과 색도 제각각으로 변하였지만 맛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마지막을 대하는지도 모른다. 그 처음을 무어라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작은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지만 끝은 공연장의 세트 같이 급하고 울퉁불퉁하며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을 아쉬워하면서도 또 마지막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 같다.
선배는 내가 회사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이번 여행을 제안했고 여행에서 깊은 속마음을 들어내 주었다. 자칫 그냥 마주 앉아 이야기로 하려했다면 충고가 될 것임을 알았던 것 같다. 선배는 첫번째 여행에서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몸에 잔뜩 묻어 있는 흙과 먼지를 직접 손으로 털어주었다. 두번째인 이번 여행 역시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회사에서 잘해오던 업무를 그만두고 새로운 업무를 하겠다고 사내공모를 신청해 놓은 상황에서 선배는 나를 묵묵히 지켜주면서 내가 느낄 불안감을 떨쳐 주었다.
선배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번 여행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았다. 만약 우리가 처음의 계획 그대로 일본을 갔다면 우리는 옛날에 다니던 곳을 그대로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차량을 운전해서 갔다면 교외의 바닷가에서 처음의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여행을 선택하던 우리는 그 시간을 충분히 만족할만한 시간으로 만들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물론 일본으로 갔다면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다시 그곳을 답사하며 우리가 그때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꿈꾸었는지에 대해 선배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면 지금의 시공간에서 벗어난 만큼 우리는 회사에 관한 얘기를 하는 대신 조개를 캐듯 다른 얘기를 들추고 꺼내기를 반복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서울로 가면서 선배와 나는 생각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여행의 목적이 다르면 가져가야 하는 짐부터 다르게 꾸며야 하듯 선배와 나 모두에게 이번 여행은 그런 장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디자이너로 회사에서 컨셉과 트렌드를 만드는 최일선에서 일하고 있고 긴 시간을 일한 우리에게 이번 여행이 변화의 기회로 찾아왔다. 어쩌면 서울과 트렌드를 대하는 것에 새로운 목적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을지로를 걸으며 드는 생각은 신묘했다. 내가 작고 오래된 상가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을 때는 나는 이곳이 걱정스럽게 보였었다. 트렌드가 바뀌면서 서울을 일으켜 세웠던 이곳이 그리고 과거 활력으로 움직이던 이곳이 멈춘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많이 걷고 시간이 가면서 내가 못 본 것이 있음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의 활력은 결코 시들거나 사라진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몫으로 넘겨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울퉁불퉁하게 끝물로 사라지지 않도록 위로하는 것도 미래로 가져가는 것도 우리의 몫인 것이다.
주말이면 나는 자주 모락산을 오른다. 집근처에 있는 작은 산이라 가기도 오르기도 쉽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태풍으로 나무들이 쓰러지는데 해가 가고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많아져 눈도 불편하고 다니기도 불편하다. 처음에는 왜 시에서 쓰러지고 오래된 나무를 치우고 깨끗하게 다듬지 않는지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문뜩 생각 한가지가 나를 일깨웠다. 이렇게 쓰러지고 썩은 나무들을 치우기 위해서는 힘든 노동이 필요하지만, 그대로 두면 여기가 한라산의 깊은 숲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의 조급하고 성급한 마음이 동네에 있는 작은 산이 한라산으로 크려 하는 것을 못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을지로를 걸으며 들었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크고 화려한 것을 작고 소박한 것이 이기긴 힘들다. 그러나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그대로 생명을 다하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것이 살아남는 데는 행운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이것을 트렌드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황혼에서 빛을 발하는 트렌드가 진짜가 아닐까 하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결론지어 본다. 그리고 선배와 약속을 했다. 이젠 앞으로 더 자주 서울로 여행을 하며 새로움에 취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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