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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Aug 03. 2023

09. 결국, 진심이 우연을 만든다

[에세이] 우연히 나란히 여행하다

도로 위 표지판이 남산터널을 가리키자 대로의 끝단과 빌딩 틈사이로 남산의 자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 조각만으로도 이젠 남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가 있었다. 명동성당에 다다른 우리는 돌로 쌓은 계단으로 오르고 자연석으로 된 길을 걸어 널따란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부에는 미사가 진행되면서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바깥까지 전해졌다. 우리에게도 정제된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성당 뒤편 성모마리아 상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떠난 일본 여행에서도 마지막 날 선배와 나는 벤치에 앉아 호수를 내다보며 지금처럼 휴식을 취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이곳은 그때만큼 자연속에 있거나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을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빨간 벽돌의 대성당을 마주하며 취하는 휴식은 과거를 회상하기에 충분했다. 자연속에 파묻혀 취하는 휴식과 비교해 보아도 인간의 손을 거쳐 만들어낸 조용함과 깊은 유산 역시도 자연에 뒤지지 않는 듯했다. 때마침 검은 의복에 모자까지 갖춘 중년의 신부가 기도하며 대성당 주위를 돌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주었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건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것을 품게 되는데 이런 모습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 같다. 건축에 슬픔도 그리움도 똑같이 많아지는 것이다. 선배와 나는 이곳에서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냥 지금의 기분을 공백으로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의 일에 침묵하고 평가하지 않기로 했고 시험지에 연필로 또박또박 써내려 가는 대신 그냥 시험장에서의 정적에 취해 보기로 했다. 이곳에서의 기억이 어떻게 남을지를 상상하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초록 신호등으로 바뀐 넓은 사거리를 걸을 때는 조각으로 보였던 남산의 넓은 면이 도로 위로 넘쳐 나오는 게 보였다. 벚꽃들까지 화려하게 피면서 그곳은 마치 다른 세상같이 느껴졌다. 나는 앞서 걸어가는 선배의 발걸음을 세우고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선배의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계획에 없던 명동성당까지 다녀온 터라 평지는 걸을 수는 있어도 비탈길은 힘들어 더는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선배는 횡단보도를 건너 똑바로 가는 대신 곡선의 길을 늦은 걸음으로 걸어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선배는 스마트폰에서 흑백의 사진 한 장을 찾아 내게 보여주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연 치고는 너무나 놀라운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였다.


“너, 어떻게 이곳에 올 생각을 했니?”


선배의 목소리는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선배가 보여준 것은 남산 신사를 찍은 사진으로 우리는 그곳이 있던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여행의 마지막날 먼 거리를 걸어 신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호수 옆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우리 둘의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 여행을 회상하며 서울로 떠난 여행에서 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때처럼 여행 마지막날 같은 시간에 신사가 있던 곳으로 걸어 들어가 호수같이 넓고 잔잔한 숲을 천천히 산책했다. 행운이었다. 이곳이 정말 좋았던 이유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내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여행이 나를 찾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한다는 말에 공감하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이렇듯 아름다움이란 변화를 따라 가기도 하지만 본 모습을 찾고 그대로를 지키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것인 찾기 위해 돌아가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아름다움은 우리가 걷고 있을 때 우리를 멈추게 하고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우연도 이렇듯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나 경로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것을 우연이라 부르면서도 어떻게 보면 이것은 우리가 정해진 방향으로 갈 때만 만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연은 우연끼리만 뭉쳐 다닌다. 그러다 보니 우연끼리 충돌하기도 하고 우연끼리 함께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연은 우리가 찾지 않으면서 길에서 파묻히기도 하고 돌덩이 같이 구르다가 길 밖으로 떨어져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변수에도 우연은 사람들이 낙오하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며 세상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 준다.


> 이미지 출처: https://gyeongnamtravel.tistory.com/entry/%EB%82%A8%EC%82%B0-%EB%B2%9A%EA%BD%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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