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kb 하우스 Jul 23. 2023

08. 작은 것이 모여 만들어진 것에는 정감이 있다

[에세이] 우연히 나란히 여행하다

내가 사는 현재의 모습들이 시간이 흘러 없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거나 찾지 못해 겪는 당혹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찾는 가치가 미래의 새로운 것에 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현재를 미래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서도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은 부활을 하여 좋았던 기억을 토닥여 주고 묻힐 번한 슬픔은 달랠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의 많은 것들이 쇠퇴하고 절망하고 정지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 긴 시간을 같이 하면 좋겠다.


이번 여행에서 걸으며 좋았던 기분대로 나의 바램은 을지로며 충무로가 시간이 흘러서도 지금의 모습으로 계속 살아 꿈틀대면 좋겠다. 국가의 동력으로 열심히 달려준 이곳이 멈추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닌 이젠 천천히 걸어 나가는 모습이면 좋겠다. 그러면서 내가 경험했던 많은 것들이 그 속을 함께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이곳 가게의 소박함이 좋았고 사람들의 성실한 모습이 좋았다. 이곳을 걸으며 나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고 큰 선물이 분명하다. 


대학에서의 디자인 전공 수업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개강과 함께 디자인 과제가 주어졌고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디자인할지 고민에 들어갔다. 처음 배우는 과목이다 보니 스스로 하기 보다 많은 시간을 선배들을 찾아가 묻고 필요한 게 있으면 도서관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리고 혹여 남과 비슷한 게 있으면 바꾸거나 다시 해야 했다. 한학기 동안 무엇을 디자인할지 정하고 나면 컨셉을 잡고 아이디어 스케치를 시작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처음의 모호하고 추상적이던 것이 그럴싸한 디자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디자인이 결정되면 목업이라 하여 디자인을 모형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부터 을지로와 친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기가 되면 이미 취향이 비슷하거나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기면서 같이 모여 과제를 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과제의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강의실에서 밤을 새기도 했고 주말에 시간을 내어 과제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디자인 목업 재료를 사는 데는 일종의 전술 같은 것이 필요했다. 전체 인원이 모여 각자가 필요한 재료와 양을 모아 이것을 사러 갈 인원을 나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하게 되면 수주가 걸리는 일이지만 분배를 하면 발 품 한 번으로 모든 걸 간단히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는 대량으로 재료를 구매하지 않아 돈도 아낄 수가 있었고 필요에 따라 내가 사지 않은 것을 빌려 쓸 수 있어 좋았다. 


우리는 몇명이 조를 짜서 한 명은 아크릴과 ABS 판재를, 한 명은 철재와 공구를, 한 명은 도료를 구하기 위해 을지로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게 끝나면 장보기를 마친 아주머니처럼 커다란 짊을 뿌듯하게 들고 대중교통에 올라 돌아왔다. 그러고 나면 겨울준비를 끝낸 다람쥐처럼 몇 달을 배부르게 지낼 수 있었다. 모델을 만드는 일은 많은 공정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ABS를 원하는 크기로 잘라 붙이고 다듬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것을 하다 보면 시간은 금세 학기말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는 이때부터는 모든 것이 초 읽기에 들어 간다. 이때가 되면 이전과 달리 서로 다른 진도와 다른 결과물을 마감 일정에 맞추고자 각자가 따로 움직였다. 부족한 재료를 사야 했고 디자인 보드에 필요한 실크스크린과 인쇄를 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 이번에는 충무로를 뛰어다녔다.


나는 을지로 충무로 같은 상가를 갈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것이 공업 기계 부속 가공과 같이 딱딱하고 생소한 것들인 데도 가게들은 하나같이 정감이 있다. 물건을 대량으로 취급하고 단골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이지만 이들은 우리 같은 대학생들을 신기해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가게에서 바쁜 일을 멈추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아주고 우리가 써 놓은 리스트와 맞는지도 확인해 주었다. 그것의 단위가 백 원이든 또 몇개가 됐든 찾아주고 크기별로 나누어 포장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길이가 큰 판재와 봉들은 수월하게 들고 갈수 있게 조각으로 나눠 주고 끈으로 손잡이까지 만들어 주었다. 작은 것이 모여 만들어진 것에는 정감이 간다. 


여기에는 나의 작은 추억과 함께 나의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것이 커지면서 뭉쳐지고 사라지는 세상에서 작고 같고 공평한 모습으로 있는 것들에 고마움을 느낀다. 작지만 꼭 필요한 분량의 대사와 역할이 주어진 배우 같고 시계를 움직이는 무브먼트 같다. 내가 걸으며 다시 만난 을지로도 그렇고 충무로도 그렇고 남대문까지도 큰 숨이 들어오는 허파같이 느껴진다. 누가 먼저고 누가 많이도 그렇다고 누가 빨리가 아닌 누구는 지게차로 누구는 손수레로 또 누구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모든 것을 나르는 이 곳에서의 아침이 내게 더 특별한 호흡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 이미지 출처: https://www.ohmynews. 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67125

작가의 이전글 07. 아침을 같이 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