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eskunde로 본 사람의 풍경

1편 독일인 친구의 수첩과 계약서

by Young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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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시간 돼?"

그 한마디에 독일인 친구는 곧바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수 없었다.

"그냥 이번 주말 어때?"

그는 미소도 없이 수첩을 넘기며 말했다.

“토요일 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라면 가능해.”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시간을 그렇게 대충 쓰지 않는다는 걸.


독일에 머무는 동안 이런 장면은 낯설지만 동시에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언제 한번 보자”라는 말이 예의지만,

독일에서는 그게 약속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약속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

감정이 아니라 계획이었다.


한번은 뉘른베르크에 갈 일이 있었다.
당시 트럭 운전을 부업으로 하던 친구에게 부탁했다.
“가는 길에 나 좀 태워줄 수 있어?”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앞에는 한 장의 간이 계약서가 놓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이동 중 사고가 발생해도, 운전자는 어떠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게 뭐야?” 하고 웃자,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친구 사이에서도 책임은 명확해야 하니까.”

그때 나는 멍해졌다.
그의 말에는 어떤 차가움도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예의가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독일에서 배운 한 단어를 자주 떠올린다.
Verbindlichkeit.
‘책임감’, 혹은 ‘약속의 확실성’을 뜻하는 말이다.

그들에게 규칙은 억압이 아니라 신뢰를 지키는 도구였다.
그래서 수첩을 꺼내고, 계약서를 쓰는 것이
인간미가 없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세월이 흘러 미국에 살고 있는 지금도
그 친구들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약속을 가볍게 말하지 않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책임을 명확히 하는 태도.
그건 단순히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신뢰받는가’에 대한 철학이었다.

이제 나는 누군가와 약속을 정할 때
그들의 방식대로 수첩을 펼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때의 한 문장을 되뇌인다.


“친구 사이에서도 책임은 명확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