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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비된화살 Jun 30. 2024

작은 스토리가 모이면 맛있다

나의 히스토리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일요일 

이른 아침,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까지 미술 전시가 있는데 혹시 시간 되면 같이 가요~
vip 초대권이 생겨서 혼자라도 갈 예정이니까 시간 안 되면 부담 갖지는 말고요


1시간 후... 대 환영한다며 집 앞으로 와서 같이 가자는 그녀의 답이 왔다. 



    

30년 가깝게 일했던 긴 직장생활로 심한 번 아웃을 겪었다. 아니 겪고 있다. 

그동안의 모든 열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고, 

애쓴 내가 가여워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안타깝게도 쓸 시간이 없던 시간이 스치듯 지나갔다.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시간도, 

좋은 공연을 볼 시간도, 

가족과 여유로운 식사와 수다 타임을 갖는 시간도 

모두 <직장>이라는 사자에게 삼켜 먹힌 것 같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각자의 삶에서 우상을 만들고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우상이 되어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돈>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특정한 <물건>이 되기도 한다.

 

결코 짧지 않은 나의 30년 직장 생활을 돌아보니 이제야 나의 우상은 <직장>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던 나에게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녀는 주말 룩이라고 하기엔 다소 단정한 세미 정장을 입고 나왔다. 

미술관에 가니 너무 편안 옷보다는 약간의 격식을 차리고 싶었다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큰 아름드리나무로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진 주차장엔 이미 꽤 많은 차가 들어서 있었다. 

그 흔한 차단기도 없고, 바닥은 아스팔트나 시멘트도 안 깔린 곳이었다. 하다못해 자갈이라도 깔아 둘 법 한데 이 집 주차장은 그냥 흙바닥이다. 

어제부터 내린 비로 군데군데 물웅덩이도 생겨있었고, 질척거리는 곳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맛있는 것을 먹고 싶으면 주저 없이 이 식당으로 향하곤 했다. 

오늘도 이곳으로 오면서 문득 혹시 문을 닫았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하며 왔다.(주중에만 왔던 탓에 주말 운영 여부를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약간 이른 점심시간인데도 2~3 테이블만 비어 있고 이미 꽉 차 있었다.

이곳은 직접 농사를 짓고 그 수확물로 반찬을 만들기로 유명한 집이다.      

여름이면 열무김치, 감자조림, 꽈리고추멸치볶음, 가지나물, 코다리조림, 묵무침등이 나온다. 

반찬은 무제한 리필이고, 밥은 찰쌀밥처럼 쫀득쫀득한 솥밥이다.

요사이 못 먹고사는 사람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왜 이렇게 무제한, 무한리필이란 단어를 보면

마음이 푸근한지 모르겠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나뭇잎이 늘어진 그늘 아래 평상에서 알록달록 몸빼 바지를 입고 고개를 쑥이 고는 

세운 무릎에 가슴을 받치고 앉은 할머니가 채소를 다듬고 계셨다.

할머니에게 뭐 하시냐고 여쭤보니 열무인데 저기에 있는 밭에서 뽑은 거라며 고개로 주차장옆 밭을 가리켰다. 이걸로 열무김치 담글 거라며 투박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여기 반찬은 모두 밭에서 수확한 걸로만 만든다며 한가득 쌓여 있는 대파를 쳐다봤다.

이 집은 온 식구가 함께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고, 다듬고, 음식을 하고, 파는 과정으로 운영하는 

스토리가 있는 집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음식은 덮어놓고 믿음이 간다.




몇 해 전 엄마 생신 때 갔던 한정식집이 생각났다. 

그곳은 꽤 값비싼 곳이었다. 고풍스러운 기와지붕의 격조 있는 집이었다. 

한적한 룸으로 안내되어 들어간 곳은 깨끗하고 안락했다.

곧이어 형형색색의 음식이 나왔다. 음식 비주얼도 서비스하시는 분들도 너무 정갈하고 멋스러웠다. 

고기 튀김이 나왔는데 고기맛이 나는 버섯 음식이 나와 이게 무슨 버섯인지 궁금하여 물어보니 서비스하던 분은 본인은 잘 모른다며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함께 갔던 가족들은 그냥 맛있게 먹자며 웃음으로 슬쩍 위기(?)를 넘겼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스토리도 없는 집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묘하게 언짢았다. 

우린 그 후로 그 집을 가지 않았다. 더욱이 그 집이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도 별 관심이 없었다.




화랑미술제 in 수원(bang eunkyum작가 작품)



식사 후 그녀와 함께 간 미술관의 그림들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다가왔고 아름다운 그림들로 우리 눈은 반짝거렸다. 클래식과 재즈의 만남 같은 느낌이 드는 그림, 

드라마틱한 색채감이 있는 그림들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거의 두 시간을 꼼꼼하게 둘러보며 나오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그림이 있었다.




작가의 의도를 열심히 설명해 주던 *도슨트 덕분이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직접 제작한 종이로 돌돌 마는 것에서 감정의 안정을 찾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점점 작게 말았던 종이롤은 좀 더 굵고 대담하게 말게 되었고 말았던 종이로 멋진 작품을 만들었다는 스토리였다. 


그렇게 작가의 스토리를 접하니 그 작품을 좀 더 심도 깊게 바라보게 되었고 작가의 의도와 심리가 내 마음 깊이 다가와 한동안 어른거렸다.


*도슨트: 미술관, 박물관등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일반 관람객에게 작품, 작가, 그리고 각 시대 미술의 흐름 따위를 설명하여 주는 사람



 

우리는 스스로의 삶이 어떤 모양의 스토리로 회자되길 원할까?

흘러가는 대로 방치하여 제목도 모르는 <기대되지 않는 음식>이 되거나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여 <소진>되는 기억에서 사라진 그림이 되는 우를 범하고 있진 않을까?


화랑미술제 in 수원(김재원 작가 작품)




내 삶은 스토리가 있고 그리고 그것이 살아 숨 쉴 때 비로소 맛있다.

한번 사는 인생 

맛있게 한번 살아보자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에 

멋있는 히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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