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솜 Nov 13. 2023

취미가 승마라고 했다가 까인 점에 대하여

바쁜 세상 속 빠르게 멸망해 버린 소개팅, 데친 콩나물 같던 그대에게.

저도 누군가에게는요. 우연히 책 속에 촤라락 펼치다 떨어지는 엄청 작은 책갈피처럼. 젊은 날, 그 어딘가에 살짝 낀 망한 소개팅녀이겠죠?


알아요. 우린 아무것도 아닌 사이. 그런 점에 있어 관계를 맺는다는 건 참 큰 의미인 것 같아요. 어린 왕자를 어른이 돼서 다시 읽으면 눈물이 나는 것처럼 말이에요. 남들과는 조금 다른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 서로의 반쪽을 찾기 위해, 그렇게 다들 열심히 헤엄치고 있네요.


아 맞다! 하고 떠오르는 사람. 콩나물 국밥 먹으러 갔다가 푹 익은 콩나물을 보니 심심하니 매가리는 없던 그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뭔가 흐릿했던 사람. 얼굴은 기억 안 나는데, 호리호리한 풍채만 기억나는 사람. 그는 잠깐 체한 것만 같던 짧은 연애 후 객기로 받은 네 번째 소개팅남. 저랑 나이터울이 꽤 있는 연상이었습니다.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했고, 회사에서 에이스이고, 워커홀릭이라며. 그렇게 휘뚜루마뚜루 소개팅이 추진되었어요.


어두운 곳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자카야에서 보자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강남에서 제일 핫하고 시끄러운 이자카야를 고르셨지 뭐예요. 룸을 예약한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가벽을 세운 바로 옆테이블에선 술게임이 한창이었습니다. 거의 서로 고함을 쳐야지만 대화가 될 정도였지만. 소개팅은 나름 설렜습니다. 참.. 기억을 돌려보는데, 비가 왔던 날이었고. 우산을 들고 갔어요. 어른스러운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 호리호리하신 분? 약간은 과묵하고 진지한 스타일이셨던 그분은 목소리가 잘 안 들렸어요. 이자카야에서 술 한 잔씩 걸치며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모로 참 바쁘시다. 회사에 이런 사람 많이 없을 거 같은데, 사장님이 찾는 인재이겠구나 했습니다. 확실히 요즘 젊은 세대 친구들과는 다르게 회사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야근하고 또 야근하고 또 야근하는 걸 마다하지 않더라고요. 모든 일상이 일, 일, 일이었습니다.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은데, 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연애할 시간은 있으실랑가?


강남에서 일을 하고 계셔서 그래도 우리 집에서 좀 가깝겠거니 하고 만났는데 정확히 우리 집 반대방향으로 강을 건너 또 한 시간 반을 올라가시더라고요. 그래도 괜찮죠. 30대 후반인데 운전은 하시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으나, 10년 장롱면허에 이번달부터 운전 연수를 받고 계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요 까짓것, 운전.. 제가 하면 되죠 뭐. 그런데 스케줄이 정말 집과 회사의 반복, 끝없는 회사였습니다. 요즘 직장인들이 하는 갓생살기와 자기는 아주 멀다고. 힘이 없데요. 딱히 취미도 없고 특기도 없고. 체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걸 체감하고, 주말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신데요. 그래서 바다에나 혼자 운전하고 가보고 싶어 연수를 받고 계신데요. 연애를 쉰 지 너무 오래돼서 자기 연애세포가 다 죽은 거 같데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데요. 이것도 신종 매력 어필일까요? 데친 콩나물같던 사람.


제가 맥박이 어떻게, 좀 떨리시는 거 같냐고 물었더니 떨린데요. 알쏭달쏭한 소개팅이었는데 그래도 또 보자고 애프터를 잡으시더라고요. 계속 귀가 아프고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소개팅이었는데 그래도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참 재미가 없고, 멋이 없어서 오히려 재미있던 만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려하지도 수려하지도 않은 언변에, 참 힘이 없어 보여서 그게 또 다음이 궁금한 느낌? 거짓말은 아닌 거 같다. 정말 저런 분인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프터는 잡혔으나, 날짜를 잡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겨우 평일 하루를 뺏는데, 또 그분은 우리의 애프터 이 하루를 위해 그 앞에 평일 삼일을 내리 야근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회사, 이제 진짜 버스 탄 줄 알았는데 아직도 회사, 동트기 전까지 계속 일하다가 퇴근하시더라고요. 하루하루 참 만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다시 얼굴을 보았어요.


애프터로 엄청 비싼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사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어른의 여유가 이런 건가 싶었어요. 애프터로 간 식당도 뭐랄까 그냥 유명한 체인점이었지만, 전 그래도 나름 좋았어요. 현실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이제는 너무 설레지만 스트레스받는 연애가 아닌, 에너지 소비를 안 하고 뭔가 되게 평화로운 거 같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생겼고요. 자연스럽게 이 분과 새로운 관계가 발전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의 착각이지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맞지 않지만, 뭔가 천천히 알아가고 싶다. 천천히 걷는 사람 옆에 서서 나도 천천히 걷고 싶다 이런 감정이 들었어요. 벤츠인 줄 알았으나 킥보드를 타고 넘어져 다쳤으니 이제는 구명조끼를 끼고 오리배를 타고 싶은 심리 같은 걸까요?


아, 그런데요. 우리가 어디서부터 망했는진 모르겠지만요. 취미가 뭐냐고 물어서 요즘 승마를 배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 바로 앞에 자연친화적인 승마장이 있어요. 승마는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은 저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운동인가 알고 싶어서 뚜벅뚜벅 걸어가서 3개월 코스를 3개월 할부로 끊었습니다. 당시에 말을 한 두 번이나 탔나? 장화도 없고, 멋진 승마복도 없이 운동화 신고 타는 아주 생초보였는데요. 거의 체험 승마였어요. 전 도전을 즐기는 편입니다. 끈기가 있진 않은데 두루두루 도전하는 편인 것 같아요. 분명히 제 기억엔 이런 부연 설명을 했던 것 같은데. 궁금해서 시작해보았다고요. 일단 이 부분이 좀 부담스러우셨나 봐요. 생각해 보면 서로의 첫인상을 이야기할 때, 저보고 살면서 아르바이트도 한 번 안 해봤을 거 같다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전 사실 알바를 꽤 많이 해보았는데요. 첫인상이니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데 취미가 승마라고 말하고 싶어서 승마를 시작했다는 저의 말이 부담스러우셨나 봐요. 뭔가 나이가 있으신 지라 결혼도 생각하고 진지한 미래도 그리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저는 거기에 걸맞은 사람은 아니었나 봐요.


계속 연락이 오다가 주말에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어요. 그리고 월요일에 다시 정중한 연락이 왔어요. 아무래도 정말 좋은 분인 거 같은데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신경 써 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 우리의 만남이 조금 힘들 것 같다고요. 그래도 참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중하시고 매너 있다. 고맙다. 저도 모든 일 재껴두고 퐁당 빠지는 그런 분 만나시라고 행복을 빌어줬어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주선자 친구가 주워 들었는데, 가장 결. 정. 적으로 그분이 저를 거절한 이유가 취미가 승마여서. 자기랑 너무 경제적 차이가 나는 것 같아 거절했데요. 솔직히 처음에는 좀 울화가 치밀더라고요. 내가 승마비를 내달라고 한 거도 아니고, 승마복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취미 승마로 몇 번 타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건가. 대단히 등이 따수운 인생을 산 건 아닌데, 나도 열심히 살았는데. 그때 복싱도 같이 하고 있었는데, 다음부터 취미는 복싱이라고 해야겠다 에라이. 이런 생각. 그리고 뭐 상대방의 입장을 정확히 들어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의 몇 마디로 또 이렇게 판단되고 또 판단하는 게 소개팅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물론 진지하게 본인과 맞는 상대를 찾는 분이시니, 삶의 가치관이나 태도 안 맞을 수 있겠죠. 그런데 나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려는 찰나의 노력 없이 짧은 만남 속에 나를 재단하고 판단하고 나의 인생을 본인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그 상황이 조금은 아쉬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물론 소개팅이죠.. 그는 그 정도의 시간적 여유나 물리적 여유가 그리고 나를 더 알아보려는 노력의 이유가 없었던 거니까요. 그런데 뭐, 그렇게 치면, 제가 물질적으로 상상처럼 풍요로우면 부담스럽고, 물질적으로 부족하면 부족해서 거절하실 거 아닌가요 오라버니.


뒷모습은 아름다웠으나, 나중에 들은 그의 완곡한 거절 사유가 참 웃기게 들렸습니다. 야근에 빠지지 말고 칼퇴시키는 그런 인연, 꼭 만나셨으면 좋겠는데. 전 오빠가 콩나물 국밥 먹다 생각났어요. 그리고 전 요즘도 스스로 되뇌어요. 그 누구를 만나도, 쉽게 그들을 판단하지 말자. 판단하지 말자. 판단하지 말자.


너는 나를 모른다. 나도 너를 모른다. 우리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맙시다. Don't judge people!



.


 

작가의 이전글 나는 금요일의 적막을 좋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