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_지나간다, 아니 저문다
"2023년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지나간다?'라고... 나는 왜 '저문다'가 아니라 '지나간다'라는 울림 없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생활에 쫓겨 '저문다'는 말이 환기하는 해 질 녘 풍경을 잊은 탓일까. 서둘러 '지나간다'라는 말을 지우고 '저문다'를 쓴다.
"2023년 마지막 해가 저문다."
'저문다'라고 쓰니,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수평선을 지나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보름달을 가로지르는 E.T.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두운 달빛 아래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입김을 불며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잠을 자면 '눈썹이 신다'고 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해가 저무는 설렘을 잊어버렸다, 아니 잃어버렸다."
2023년 12월 31일과 2024년 1월 1일은 어제가 오늘로, 오늘이 내일로 바뀌는 일상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그 속에 깃든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감정의 깊이를, 공감의 폭을 잃어가고 있다. 낭만을 잃어가고 있다.
"고독사로 추정되는 남성이 발견되었습니다."
뉴스에서는 기자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는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섬이 되어 떠다니고 있다.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싶지도 않고, 누구에게 간섭 받고 싶지도 않다. 낭만은 불가능한 꿈을 향한 이상적 태도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시대의 낭만은 오지랖일지도 모르겠다.
2024년 1월 1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