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언제 어떻게 당신의 스위치를 켜나요
도무지 서서히 켜지는 법이 없는 스위치, 트리거
"엄마랑 싸웠어."
언니입니다. 분명 무지하게 울다가 메시지를 보냈을 거예요. 싸웠다고 표현했지만 들어보면 티격태격이 아닙니다. 엄마가 유발한 어떤 계기로 언니가 엄마에게 화가 나서 쏘아붙이고,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엄마가 반격하며 큰 소리를 내고 이런 것 같아요. 두 분의 감정은 시작부터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화가 난 언니를 뭐라고 달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도 그렇고요. 왜냐면.. 아무리 봐도 문제가 해결될 여지가 없거든요. 들어보세요.
엄마는 동네 친구분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점심도 먹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그러죠. 그러다 보면 나이 드신 분들을 주로 공략하는 마케팅에 노출됩니다. 건강에 좋다고 하지, (당장) 돈이 드는 건 아니지, 나를 반겨주지, 친구를 데려가면 칭찬도 해주지, 안 갈 이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예상 가능하죠. 그렇게 관계를 형성하며 엄마는 긍정적 경험을 하고, 이상한 물건에 생각지도 못한 지불을 하기도 합니다. 아, 이번에 무언가를 사신 건 아니에요. 하지만 또 어딘가에 다니기 시작했고 언니가 애진작에 불만을 표현해서 안 가기로 약속(이라기엔 엄마는 상황을 쫑내고 싶으셨겠죠)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계속 다니셨던 거죠.
엄마는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입니다.‘아직’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엄마가 맞아요. 하지만 그동안의 학습으로 언니는 그 끝이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언니는 화가 났고 엄마는 잘못한 건 없는 억울한 상황입니다.
'엄마 때문에 화가 난' 언니의 감정은 불안 같아요. 어떤 패턴 안의 엄마는 분명 언니의 불안 스위치를 켭니다. 그 스위치는 거의 두꺼비집 수준이라 언니의 모든 부정적 감정을 다 건드립니다. 안타깝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켜는 스위치는 찰나이며 매우 강력합니다.
엄마의 어떤 행동은 언니의 정서적 트리거(emotional trigger)입니다. 정서적 트리거란, 특정 상황, 단어, 행동, 또는 사건에 의해 강렬한 감정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정서적 트리거는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나 트라우마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반복되는 경험이라면 뇌와 감정에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거예요.
언니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 그 과정에서 대놓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던 경험이 쌓여있는 거 같아요. 그 경험이 힘들었고, 그 후 더 나은 경험이 따라온 것도 아니니 그때의 감정은 부정적인 모습 그대로 어둡게 웅크리고 있다가 스위치가 켜지자마자 전부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반복될 거라는 불안감, 그 과정에의 외로움, 피해의식이 언니의 분노 저변에 자리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엄마는 지금을 얘기하고, 언니는 과거-현재-미래의 엄마를 상대하니 이거 참 좁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아마 계속 반복될 겁니다.
부정적인 트리거만 있는 건 아니에요. 특정한 음식 냄새를 맡을 때, 사진을 볼 때, 어떤 장소를 지나갈 때, 음악을 들을 때 따라오는 좋은 감정들도 있습니다. 이런 트리거는 기쁨, 만족, 안도, 기대감 등의 긍정적 감정을 끌어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부정적 트리거의 키만 쥐고 있다면 너무 별로인 것 같습니다. 언니가 엄마와 함께 한 혹은 함께 할 경험 속에서 긍정적 트리거도 만들어 냈으면 좋겠어요. 부정적 두꺼비집이 켜지더라도, 언젠가는 긍정적 두꺼비집도 켜질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을 테니까요.
그렇게 긍정적인 트리거를 통해 관계의 좋은 면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트리거에 대처하는 방법을 습득하며 정서적인 안정을 유지한다면, 비슷한 상황에서 언니와 엄마의 세상이 지금처럼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