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세상을 떠났다.(시리즈 3)

남겨진 나 로 살아가기

by You앤Me Art Place

죽음.


기억하세요. 젊은이는 늙어요. 늙은이는 죽어요.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의 말이 자주 맴돈다.

이 얼마나 직설적이고도 꿰뚫는 진리인가.

젊은이는 늙는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동안 빠르게 늙고 있다.

늙은이는 죽는다... 어느새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있다.


햇볕에 널었다가 방금 걷어온 이불에서나 맡을 수 있을법한 이모할머니 냄새.

구름자락 같던 짧은 컬의 부드러운 흰 머리카락. 분홍색의 귀여운 오리가 달린 옷핀.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바나나를 올 때마다 한 다발씩 사 오시고.

일평생 원하던 마론인형을 내 손 잡고 시장에 데려가 단번에 사서 내 품에 들려주시고.

매일 안부를 물으러 공중전화에 달려가던 나에게 십 원짜리 동전을 한 봉지를 갖다 주시던.

이모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나의 추억과 그리움.


어린 시절 나는 유독 이모할머니를 따랐다.

미국생활을 오래 했던 이국적인 이모할머니는 말 그대로 이국적이었다.

얼굴도 하얗고 바셀린을 바르고 말투는 항상 젠틀하고 차분해서 당시 여느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계셨다.


다 큰 친 손주들과 부촌에 살고 계셨고 사정이 있어 출국이 안된다는 아드님과는 오랫동안 떨어져 계셨는데 쪽방 같은 우리 집을 좋아하고 늘 찾아오셨다.

엄마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실로 얼굴의 털을 밀어드리기도 하고 또 닭죽을 쑤어드리고 항상 잘해드렸다.

나중에 아예 별것도 없는 우리 동네 작은 연립으로 이사를 오셨다.


거의 매일 찾아갔던 것 같다.

신문의 텔레비전 7번 9번 11번 채널의 시간대별 프로그램을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 드리기도 하고 희고 보드라운 발과 다리를 주무르거나 머리가 아프다 하시면 머리통을 어떻게라도 만져드리고 환자를 대하는 꼬마의사처럼 내내 그러다가 잠드시면 슬며시 빠져나오곤 했는데 솔솔 주무시는 할머니를 보는 게 그렇게도 흐뭇했다.


초등학교4학년. 갑자기 우리 가족은 먹고사는 문제로 할머니를 두고 정말 멀리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는데 나는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친구랑 헤어지고 학교와 동네를 떠나는 건 괜찮았다. 우리가 좋아서 곁으로 오셨는데 홀로 그 동네에 남다니... 함께 가실 수는 없는 건지 어린 나이에 속상하고 눈물이 났다. 그런 이별은 생이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연탄가스를 맡고 죽을뻔한 적도 있는데 가족모두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을 때 한 번도 주일날 아침 우릴 찾은 적 없는 할머니가 이상을 감지하고 문을 부서져라 두드린 덕에 간신히 기어 나와 우리 모두는 살았다. 어찌 알고 오셨을까. 할머니가 갖다 주신 박카스를 한병 따서 마시고

나는 그날도 비틀대다가 기어코 주일학교에 갔다. 혼자 자랑스러웠고 살아서 감사했다.

할머니는 나의 은인이다.


우리 가족이 일이 잘 안 되어 다시 서울로 상경했을 때 젤 먼저 오래오래 버스를 타고 자도 자도 한참만에 도착한 할머니의 집에 방문했다. 여전히 어른 손주들과 같이 살고 계신 할머니를 다시 반갑게 만났고 그 후로도 멀미를 참으며 찾아가 예전처럼 발과 다리를 주물러 드리다가 돌아오곤 했다.

손주들은 할머니를 매우 편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 이모할머니는 나에게 있어, 지극히 돌봐드리고 싶고 또 계셔만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은 다시없는 존재였다.

그런 할머니도 어느 날 돌아가셨다.


암이니 합병증이니 하는 몹쓸 것들로 할머니는 그나마 늘 누워있는 것조차도 괴로워 보였다. 본인은 입을 떼기도 어려우면서 손주들을 시켜 내게 바나나를 주라고 하시는데 세상에서 가장 맛없고 슬픈 바나나를 나는 거부하다가 한입 베어 먹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바나나가 아무리 맛있는 거라 해도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할머니는 죽어가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할머니가 내가 발걸음이 뜸 하다고 처음으로 가벼운 역정과 서운함을 표현했을 때 나는 듣고서 모른 척했던 중2. 그 중2 사춘기였다. 그리고 거기가 좀 멀었어야지. 그렇게 너무 오랜만에 찾아갔던 나는 나 때문에 더 속이 상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외국에서 찾아오지 못한다는 그 미운 아들네 대신 엄마 아빠가 더 고민하시던 그 장례를 마치고 첨으로 할머니 유골을 보관하고 있던 곳에 나만 따라갔었다. 무덤도 아니고 화장이라니 화가 나고 미웠다.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 속으로 백번을 외치며 눈물만 떨구고 돌아왔다. 분홍색 오리가 달린 그 옷핀만 달라고 해서 받아 왔다. 오리를 매만지며 울었다.

할머니가 살아 돌아오는 꿈을 꾸고 또 꾸어도 계속 속아서 눈물로 기뻐했다가 눈뜨면 허무하곤 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니 죽은 할머니가 다시 살아오길 믿음을 모조리 끌어모아 몇 번이고 기도하곤 했다.


그렇게 나의 사랑하는 이모할머니가 가셨고

캐나다에서 친할머니가 돌아오셨다.

그 후로 오랫동안 할머니 앓이를 하고도 여전히 이모할머니 생각이 났다.

가장 받아들이기 싫었던 죽음 앞에 나는 절망했던것 같다.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이 참 싫었다.


젊은이는 늙어요.

늙은이는 죽어요.

*게재된 글과 사진은 모두 제가 찍고 그린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