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면서 만난 유태인

by 원우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이란 전쟁을 보면서 미국에서 내가 만나고 겪은 유태인들이 떠올랐다. 누구나 다른 민족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이 있어 서로 다른 시각은 존재하지만 나는 이번에 내가 보고 겪은 것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처음 만난 유태인 교수는 선물시장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무성하게 자란 턱수염을 가진 영화배우 Anthony Quinn 같이 생긴 분으로 80년대 말에 교재가 없어서 자기가 발간하려고 준비 중인 책의 원고를 Print 해서 교육을 받았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대학 때 느꼈던 그 머리 좋은 사람들의 강의 즉 칠판의 내용을 그냥 베끼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그걸 식으로 써서 정리하는 교수 즉 마치 대학교 만났던 본교 출신 수리경제학 교수가 떠올랐다. 그 어려운 공식을 칠판 가득히 쓰고 설명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고 내용을 노트에 쓰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존경의 염이 저절로 생겼던 분이 연상되는 분이다.


우리가 미국에서 살던 집 근처에는 유대교 교회당이 있어 예배가 열리면 같은 동네에 사는 많은 이웃들이 머리에 빵떡모자(키파)를 쓰고 교회를 가는 모습을 보면서 평소에 몰랐던 유태인이 내 주위에 많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아왔고 몇 년 전 하마스조직에게 납치된 이스라엘 국민들 중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사진을 교회당 길가 도로에 전시에 놓은 기억과 예배 모임이 열리는 날에는 그 큰 주차장이 꽉 차고 그리고 항상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식당 고객 중에도 유태인이 있었는데 그중 점잖은 한 할머니는 손녀들과 식사를 자주 하러 오시는 분인데 그분은 손녀딸에게 유태인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Jewish이자 Catholic 신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과 단골 손남중 한분은 1남 1녀 가족이었는데 장성한 아들이 한동안 식당에 오지 않아서 물어보니 이스라엘에 군대 복무하러 갔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 내가 좋아했던 영화 로버트 레드퍼드와 바바라 스트라이샌드 주연의 “The way we were”의 주제가 노래를 불였던 내가 좋아했던 가수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는 이스라엘로 영구귀국하여 가끔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 방문하면 공항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부르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New York에 가면 키파를 쓴 사람이 많이 볼 수 있는데 내가 사는 Dallas는 별로 없어서 유태인 친구한테 물어보니 Texas는 지역색이 강해서 드러내 놓고 모자를 쓰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그리고 내가 살던 Dallas의 시장은 유태인 여자분이었는데 Houston과 비교해서 인구폭증을 막은 분으로 칭송되는데 그 이유는 해수면이 낮아 뉴우올리안즈시를 초토화시킨 태풍 카트리나피난민들이 몰려 올때 연방정부 지원이 없으면 피난민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하여서 인구 폭증을 막았다는 보도가 생각난다.

미국에서 키신저가 살아있을 때 중동에서 일어나는 분규에 대해 물은 적이 있는데 그분은 중동에서의 분쟁은 아랍인이 일으킨것으며 그 분쟁으로 많은 이스라엘국민이 희생되고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하여 그 당시 몇 배나 많이 죽고 있는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 영토를 유태인에게 내어준 중동인들과 겹쳐 보였다.


그래도 Dallas에 살면서 가끔 Market 같은 곳에서 키퍼를 쓴 사람을 보면 가끔은 이상한 생각 즉 미국에 오면 자기가 어디 출신인지는 잊고 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어디서 본 글귀와 겹쳐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내가 느끼는 것은 유태인들은 자기네가 유태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대학에서 학내 데모가 극성이었을 때 하버드 흑인 여자 총장인 게이 박사가 의회청문회에 불려 나와 한 여자 의원이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장하는 것은 괴롭힘이나 위협에 대한 하버드대 교칙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Yes or No로 답변하라는 질문에 “맥락(Context)에 달렸다”라고 답하고 어떤 맥락을 말하냐”는 물음에는 “개인을 표적으로 삼는 경우”는 “이 모든 것 속에서 증오에 맞서고 학문적 엄격함(나의 근본이 되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을 지키겠다는 나의 약속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고 인종차별로 인한 인신공격과 위협을 당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말했고 그 당시 유태계 억만장자 투자자인 윌리엄 A. 애크먼(William A. Ackman)과 같은 일부 유력 졸업생들의 주요 표적이 되어 반유태주의 학생 list를 달라는 요구와 학내 데모를 주도하고 있는 학생들의 취업을 막기 위해서 Black list를 만들어 취업시장에 배포하겠다는 보도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은 감히 학문과 지성의 최고인 상아탑을 책임지고 있는 학식이 놓은 총장 같은 분에게 일개 의원이 무례하게 Yes or No로 질문을 던지는 것과 내가 배운 지식 즉 2차 대전 때의 유태인 학살은 그 당시 유럽인들의 동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역사학자의 comment가 생각났다


유태인은 미국인구의 2.4% 760만이나 학계, 산업, 금융, 법률, 언론, 영화,IT—같은곳에서 요직을 점하고 있어 영향력은 막강하다. 한 앵글로 색슨계통의 미국친구한테서 미국에서의 공장이 폐쇄되어 많은 Blue Color Job이 사라진 진 이유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불균등 배분과 그리고 그 금융의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유태인이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직까지는 자기 생활과 Job에 영향이 없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미국에서 학내 시위가 심할 때 New York에 사는 친한 후배한테 왜 데모하는 사람들이 많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 친구 왈 데모대의 상당수는 학생뿐만 아니라 평범한 미국시민이 상당수 참여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미국사람들도 자기네 생활이 영향을 받으니까 학내 데모를 하는 학생들에 동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냉혹한 현실은 받아들여야 하니 미국의 부와 권력이 한 민족에게 치우쳐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러한 가운데 서서히 지고 있는 나라라고 말하는 미국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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