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소회

by 원우

오늘 베트남과 태국의 축구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았다. 23세 선수들이 출전한 SEA game 결승이었는데 김상식 감독의 베트남이 전반전의 2대 0의 열세를 만회하고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개최국 태국을 3대 2로 이가는 각본 없는 드라마 같은 경기를 연출했다.


매스컴에서는 한국감독의 우수함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보도를 많이 하지만 나는 그것이 위대한 베트남국민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그 나라 축구는 계속 발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하노이라는 도시에 몇 달을 체류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근무했던 회사는 베트남 현지 사업 개척과 동아시아 지역담당자로 나를 임명하려고 사전답사차 방문을 하라고 하여서 나는 그곳에 체류하면서 현지법인에 몇 달 근무하면서 베트남을 경험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는 구 (주)대우의 해외사업부문이 활발히 진출해 있었고 경남기업이 건설한 건물이 최고층건물이었고 삼성전자와 LG는 서서히 본격적으로 진출하려고 준비할 때이었다. 내가 근무한 기업은 중소기업체이었는데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려고 공장도 건립하고 대관업무도 서서히 영역을 넗혀가고 있었다.


그때 만난 관료는 작은 키의 눈이 현명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좀 많고 소련에서 박사를 받은 유학생출신 관료였다. 그가 유학가게 된 계기는 원래는 미국과의 전쟁에 지원하여 병사로 근무하기를 원하였으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국부인 호지명이 소련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며 그곳이 곧 전선이라고 이야기해서 소련에 가서 석박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정부관료가 되었다고 한다. 소련에 가서도 한분야만 공부하였고 귀국하고 나서도 같은 분야에 근무하고 있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분 덕분에 많은 Hanoi친구들을 소개받았는데 그때 깨달은 것은 북부 베트남 사람들은 신장이 남쪽보다 크고 체구도 건장하여 우리나라 사람 같은 체형이 많았고 내 또래의 베트남 사람들은 유학을 어린 시절에 배워 말(영어)이 안 통할 때는 한자로 소통하였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통일 후에도 베트남은 남쪽 사람들을 숙청하지 않고 기용하였으며 경제는 남쪽출신 사람들이 정치는 북쪽 출신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 이야기로는 남쪽출신은 상업에 소질이 있고 북쪽 사람들은 관료 쪽이 많이 진출해 있다고 들었다. 우리 회사도 남쪽 호지명시의 당당 사장은 남베트남의 정규군 직업장교출신인데 그는 통일 후 일정기간 사상 교육을 마치고 퇴소 후 직장을 잡았다고 하였다.


우리 회사는 하노이 공대 출신 직원들이 많았는데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남자 직원들은 퇴근 후에 운동복을 갈아입고 스쿠터를 타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축구장(내 기억에 5-6개 정도의 작은 경기장)에 가서 퇴근 후(덥지 않을 때) 직장인끼리 매주 경기를 벌이곤 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좋아하여 40대 초반까지는 경기에 참가하곤 했는데 나는 이곳에서 수비수로 기용이 되었다. 승부는 2대 1로 우리가 상대 직장팀한테 졌는데 경기 후에는 시원한 맥주와 닭 한 마리 같은 음식을 가지고 상대회사팀과 뒤풀이를 하는데 나도 참가를 하였다.


서로 경기내용을 분석하고 상대방전략을 공유하면서 우리나라 축구에 대해서 특히 박지성(그곳에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의 최근 경기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그처럼 축구를 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진지한 토론을 하는 장면에 감명을 받았고 박지성이 최근 경기에 대해서 세밀한 분석을 하는 것에 축구에 대한 열정을 느껴졌다. 어설프게 한국사람이라고 박지성에 대해 좀 안다고 잘난 체하면 망신당할 수 있다고 느꼈고 그들은 아이트호반에 그때 뛰었던 박지성이 몇 번의 chance가 있었고 어떻게 골을 넣는지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베트남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 너희들 이렇게 축구에 진심이고 열심히 하면 곧 한국도 추월할 것이라고” 통일된 베트남의 엘리트들이 생활축구를 이렇게 진지하게 같이 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항상 걱정 하는 “문약한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하루는 관료가 자기 친구들을 몇 명 소개해 준다고 프랑스식당에 (프랑스 식민지 지배들 받아 맛있는 음식이 많다. 나는 Pho도 프랑스 음식의 영향으로 국제적인 음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대를 했다. 평일 점심시간을 잡았는데 통성명하고 나서 반주를 하기 시작했다. 계속 술을 권해서 나는 한국에서 낯부터 취해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한국에서는 십중팔구 집에서도 쫓겨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12시에 시작한 술자리가 2시 반쯤 파했는데 식당 도착시간은 다 달랐지만 대다수 친구가 술을(좋은 술)을 가져와 쉬지 않고 마셨다. 헤어지기 전에 그 좌석에서 친해진 소개받은 다른 관료한테 이렇게 취해서 집에 들어가면 괜찮은 지 물어보았다.


그 친구왈 ‘베트남에서는 남자가 이렇게 술 먹고 늦게 들어가도 괜찮다고 하면서 저녁에 자기 처가 애들 과외하는데 다 알아서 ride 준다고 하면서 이래도 괜찮은 이유는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베트남 역사상 한 번도 외세에 굴복해서 베트남 여자들이 외세에 지배당하게 하지 않았다” 하여서 여자들이 베트남 남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네들을 보호해 주었고 또 줄거라 생각해서 아직은 괜찮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좁은 공간에서 소형스쿠터를 타면서 별다른 사고 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것 보면서 깨달은 것(좁은 공간에서 적과 싸울 때 적보다 2배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싸울 수 있겠다)과 겹쳐 갑자기 그들이 다시 보였다.


그래서 베트남역사를 공부하러 박물관에 가보니 몽고 침략 때에도 왕은 항복하자 그랬으나 그 당시 명망 높은 한 유학자가 항전을 주장하여 건기에 몽고군이 하노이로 진격하게 하고(수도를 비워주고) 우기에 열대지방의 풍토병과 독충으로 그리고 둑을 터트려 몽고군이 제 발로 물러 나게 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도 우리들처럼 유학을 숭상하여 미군폭격 시에서 하노이의 중심서원이 폭격되지 않아 그곳을 허물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된 곳도 가 보았다. 베트남 친구한테 입시 때면 자식 시험 좀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학보모와 아이들로 문전성시라 들었다.


하루는 hotel에 있는데 뉴스에서 중국함선이 베트남 영해로 잘못 들어와서 베트남이 전군동원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서해에서의 중국어선의 불법어획과 영해 침범한 중국함선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미지근한 대응이 떠올랐다.


미래가 밝은 그리고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는 그곳이지만 나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미국에 있는 처자를 두고 세집 살림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중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가끔 그때 만났던 친구들이 그립고 그때 잡은 기회가 아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