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서 매일 비슷한 루틴으로 생활하다 보니 어느 날은 문득 이렇게 햇볕을 안 봐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일 산책하러 밖으로 나가긴 하지만 햇볕이 싫어 주로 저녁에만 나가는 터라, 해가 있는 시간에는 거의 집에만 있다.
나 이러다가 비타민D 부족해가지고 구루병 걸리는 거 아냐?
응. 아냐.
한국에는 사계절이 있다지만 봄, 가을은 그저스쳐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던가. 나는 가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광합성 작용을 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햇살 좋고,날씨 좋고. 그래 서울까지 왔으면 고궁 한 번은 보고 가야지. 혹시 알아? 여기서 어떤 사극의 영감이 떠오를지?
경복궁은 예전에 친구들과한 번 가봤던지라 이번에는 창경궁으로 향했다. 역시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여긴 과거에 내가 살던 곳이야." 라며 너스레를 떠는 친구에게 "하긴,상궁도 궁궐에 살잖아." 하고 맞받아 치는 관광객들을 보며, 입구에서누가 똑같은 대본을 돌리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들어서는 사람들마다 같은 대사를 하고 있었다.
고궁에서의공주, 상궁드립은 여성관광객들의 국룰인가 보다.
창경궁을 들어서면 정면에 명정전이 보인다.
정전 양옆에 서 있는 비석 같은 것은 품계석으로 품계를 비석에 새겨 정1품부터 차례대로 자신의 벼슬에 맞는 품계석 위치에 자리했다고.
그놈의 줄 세우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떻게 하면 저런 라인을 탈 수 있나요.
위를 봐도 아무도 없고 아래를 봐도 아무도 없는데
나는 지금 공중에 떠 있는 걸까요?
창경궁에는 춘당지라는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경복궁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그래서인지 뭔가 아늑한 느낌이 든다. 다만 녹조가 심해 내가 갔을 당시에는 한창 공사 중이었다. 춘당지는 여름에도 좋지만 가을에 낙엽으로 물들었을때, 또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우니 사계절을 돌아가며 와봐도 좋을 듯하다. 여기는 나무가 없는 명정전과는 달리 어디로 눈을 돌려도 다 푸릇푸릇한 나무가 우거져 있어,나는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춘당지를 돌았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그 시절의 왕도 걸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
아. 날씨가 너무 좋아서인지 영감은커녕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계속 걸었더니 배만 고프네. 아무래도 사극은 포기해야겠다.
창경궁을 돌아보고 종묘를 지나 종로 3가까지 걸었다. 나는 길을 걸을 때 가장 생각이 잘 떠오는 타입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뭔가 떠올리기도 하고 건물을 보며, 혹은 반짝이는 조명과 네온사인을 보며 뭔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는 조용한 길을 걷기보다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곳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곳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사람에서 시작된다. 스쳐 지나는 한 사람에게서도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핫플로 가자. 나는 서순라길로 향했다. 요즘 핫한 가게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평일임에도 웨이팅 줄이 길게 서 있는 가게들이 보였다. 손님들은 인도 옆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 와인, 커피등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게서 뭔가 모를 편안함과 여유, 약간의 행복이 느껴졌다.
단지,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와인과 해질 무렵 켜진 은은한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착각한 것일까? 뭐. 그들의 속사정이야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 장소가 사람들을 그렇게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인지, 그런 사람들이 그 장소에 모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여유와 행복이 넘쳐나는 그 장소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핫플까지 가서 내가 얻은 것은 뭘까?
나는 맛집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굳이 손님 딱 한 명 있는써브웨이로 들어가,메뉴명조차 기억나지 않는,행사 중인 아무 샌드위치를 먹은 후 지하철을 타기 위해 종로 3가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걷는 길을 보고, 그 길에 위에 세워진 건물들을 보며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종로3가역이 나왔다. 아. 여긴 밤에 와야 제 맛인데. 달도 뜨기 집에 가다니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