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향적인 내향인으로 살아오며 깨달은 게 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좋아하지만, 모든 자리가 다 같은 어울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합창단 활동을 한다.
연습실에 모여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면, 처음엔 제각각 흔들리던 목소리들이 조금씩 한데 모여 간다.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고음과 저음이 겹쳐지고, 나의 작은 목소리도 그 안에 스며든다. 내 목소리가 특별히 두드러지진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음성과 만나 하나의 화음을 이룰 때 가슴이 벅차오른다. 무대 위에서 단원들과 어깨를 맞대고 서 있으면, 관객을 마주하는 긴장감 속에서도 묘한 안도감이 찾아온다. 합창은 늘 나에게 충만한 울림을 안겨준다.
하지만 같은 노래라도 노래방은 다르다.
친구들과 함께 손뼉 치며 다 같이 부르는 건 즐겁다. 그런데 마이크가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모든 시선이 내게 쏠리고, 반주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데, 가사를 따라 부르는 순간마다 괜히 내 음정이 평가받는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합창단 노래실력 좀 들어볼까?”라는 농담 섞인 말이 내게는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합창은 함께 만들어내는 조화인데, 노래방은 홀로 증명해야 하는 무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합창은 ‘공명’이고, 노래방의 마이크는 ‘주목’이었다.
합창단에서의 나는 누군가와 목소리를 나누며 하나가 되는 순간 충만해지고, 노래방에서의 나는 spotlight 속에 홀로 서 있는 기분에 마음이 위축된다. 결국 나에게 어울림은 단순히 사람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어울림이 함께하는 울림인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무대인가에 달려 있었다.
이제는 알겠다.
모든 자리에 다 맞출 필요도 없고, 억지로 즐거운 척할 필요도 없다. 합창단에서의 나는 충만하고, 노래방에서의 나는 불편하다. 그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나는 내향적이지만 동시에 외향적인 면도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좋아한다. 다만, 그 즐거움은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달려 있다. 조화 속에서 함께하는 합창은 내게 큰 기쁨이 되지만, spotlight 앞에 홀로 서는 노래방의 마이크는 내향적인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외향적인 내향인으로서 나는 이제 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방식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는 감각이야말로 내 삶을 지켜주는 지혜라는 것을.
오십이 되고 나니,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조화로운 함께’ 속에서 더 깊이 열리고, spotlight 앞에서는 자연스레 물러난다. 이것이 나답게 사는 방식이고, 외향적인 내향인으로서 나만의 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