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밖은 위험해

내 안전은 내가 지킨다

by 달콤살벌꼬마마녀

살면서 나보다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심한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만큼 나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못해 분통하기 이를 데 없는, 자타공인 안전염려증, 안전민감증 중증 환자다. 안전불감증이란 단어는 내 사전에는 처음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예정.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첫째도 둘째도 무조건 안전이 우선이다. 기대수명 100살인 시대에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려면 위험요소는 당연히 원천차단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어릴 때부터 그랬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펼쳐지는 나만의 상상의 나래..

9시 뉴스에서나 접할 만한 사건사고가, 보통의 평범한 일상에서는 일부러 불쏘시개를 짊어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지 않는 한, 쉽게 마주치려야 마주칠 수도 없는 특수한 재난상황이 언젠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실제로 들이닥칠 것만 같은 그런 몹쓸 상상 말이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혹여 일순간 그랬더라도 금세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버릴 만한 별것 아닌 뉴스거리도 나에게는 당장 내일 일어날지도 모를 구체적인 위협으로 느껴졌다. 뉴스의 사회면은 늘 무시무시한 내용들 투성이었고, 그런 기사거리를 우리 가족에게 일일이 대입하고 투영하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어쩌면 평생 일어날 가능성이 1%도 없는, 쓰잘떼기 없는 근심들로 가뜩이나 예민하고 걱정 많은 나를 괴롭히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정신건강에 1도 도움이 안 되는 헛짓거리를 하고 있던 셈이다.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긴급구조 119'와 '위기탈출넘버원'은 나의 최애 프로그램.

불이 나면 자세를 낮추고 젖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엘리베이터는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해서 빠져나가라. 차가 물에 빠지면 문이 열리지 않는데 이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차가 물에 완전히 잠겨 압력이 동일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 문을 열면 열릴 것이다. 아니면 헤드레스트를 빼서 유리창 모서리를 힘껏 깨부수고 탈출하라 등등..

위기상황별 실제 사례들과 그 대처법 교육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의 위기대응지식의 8할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 참 피곤하게 살았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만, 그래도 당장 떠오르는 기억들을 나열해 보자면 대충 이렇다.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가면 혹시나 배수구가 열려있어 발이 빨려 들어가 물에 빠지지는 않을지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지하철역에서는 어떤 미친 싸이코가 나를 선로로 밀어 넣진 않을까 멀찍이 벽에 기대어 섰다. 에스컬레이터는 언제든지 갑자기 멈출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손잡이를 늘 꼭 붙잡았고, 행여나 발이 낄까 노란선은 절대 밟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횡단보도 신호 바뀐 후 3초. 좌우는 물론이오, 그 반대편 차선까지도 두리번거리며 확인 후 길을 건너는 건 어릴 때부터 지켜온 오랜 내 습관이다.


남들 다 즐긴다는 익스트림 스포츠도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자, 수명을 깎아먹는 지옥행 특급열차. 제 아무리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유명한 관광지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위험요소가 있다면 그곳은 내 리스트에서 탈락됐다. 여름철 바닷가나 계곡에 놀러 갈 때면 구명조끼는 기본옵션, 튜브와 로프까지 챙겨가 나무에 단단히 묶어두고 있어야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기곤 했다, 여행 한번 가려면 현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여 온갖 물건을 바리바리 챙겨야 했기에, 내 짐가방은 2박 3일 여행에도 마치 이민이라도 떠나 듯 넘쳐흘렀다. 비록 한 번도 사용 안 하고 그대로 가지고 올 지언정,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막상 필요한 상황에 물건이 없는 건 내 성격 상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기에 플랜 A~Z까지 내 준비물 목록은 늘 빼곡했다. 알파벳이 Z까지 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당연히 집에는 손에 닿을만한 곳곳에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고, 위기의 순간 뛰어내려도 죽지는 않을 3층 이하의 집만 골라 다녔다. 외출 시 내 가방 안에는 호신용 페퍼스프레이와 호루라기, 만약의 화재발생 시 뜨거운 열기 및 유독가스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해 준다는 휴대용 마스크가 들어있다. 자동차 안에도 언제든 탈출 가능하도록 유리 깨는 망치와 가위, 차량용 소화기, 혹여 고립되거나 위급상황에 필요할지도 모를 최소한의 간식과 물이 준비되어 있고, 남북관계가 조금이라도 경직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당장 전쟁이라도 날 듯 비상물품을 집안에 쌓아두고 욕조에 물을 받아놔야 안심이 되었다. 1년에 2번, 봄가을에 우리 가족구성원 숫자에 맞춰 미리 준비해 놓은 재난대비가방을 점검하고, 재정비하는 건 빼놓지 않는 나의 연례 루틴.


이쯤 되니, 나 스스로도 내가 도무지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여겨지는데 남들 눈에 비친 나는 오죽했으랴.. 아마 다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속으로 이런 또라이가 다 있나.. 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도 그렇죠?? 뭐..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생각해도 이런 나는 좀 많이 이상하거든요 ㅎㅎㅎ


애써 좋게 포장한다면 유비무환의 자세라고나 할까.

일본 여행 시 지진대비 헬멧과 재난키트까지 야무지게 챙겨 온 나를 보고 가족들은 가지가지한다며, 유난이다 타박했지만 이래야 내 맘이 놓이는 걸 어찌하랴..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무서워서 대체 평소에 어찌 사냐며 혀를 쯧쯧 차곤 하는데, 하지만 다들 두고 보라지.. 준비된 자만이 위기의 순간에 살아남을 것이로다.. 후후훗!!


앗. 그러고 보니 추석이 한참 지났네.

재난가방 점검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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