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한 똥싸개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아시나요..
<과민성대장증후군>
- 장관의 기질적 이상 없이 만성적인 복통 또는 복부 불편감, 배변 장애를 동반하는 기능성 장 질환.
전 세계 인구의 약 30% 정도가 앓을 정도로 굉장히 흔하다면 흔한 질환 중 하나이다.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하지만 그 30% 안에 내가 들어간다면 그때는 얘기가 다르지..
아직까지 밝혀진 명확한 원인도 없고, 스트레스 조절 및 식이습관, 유산균 섭취 등등, 100% 완치되는 약 또한 현재로선 없다. 그래도 이 질환으로 인해 치명적인 병이 생긴다던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은 없다 하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랄까. 하지만 과민성 대장 질환으로 고생하는 나를 포함, 수많은 동지들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삶의 질을 수직하강, 현저히 떨어뜨리는 고약하기 짝이 없는 불청객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릴 때부터 항상 긴장만 하면 배가 아팠다. 시험 보기 전, 중요한 회의나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 극장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막히는 도로 위 차 안에서.. 조금이라도 긴장을 하면 복통이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면 화장실을 내 맘대로 갈 수 없거나, 주변에 화장실이 없는 공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어김없이 그분이 찾아오셨던 거 같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늘 그러지..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근데 얘들아.. 그게 되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니..
이 글 또한 쓸 일이 없지 않겠니.. ㅋㅋ
그냥 단순한 복통이 아니라 정말 까딱하다간 길바닥에서 실수할 것만 같은 그런 초응급한 배아픔.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손이 차가워지고, 다리를 이리 꼬고 저리 꼬아봐도, 아무리 초인간적인 참을성을 지닌 위인이라도 참으래야 참을 수 없는 그런 긴박한 배아픔이 줄곧 아랫배를 강타하니, 진짜 하늘이 노래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무교인 나도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까지 그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이 고난에서 꺼내주시기만 한다면 영원히 그 종교에 귀의하겠노라 결심을 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눈에서 별이 보일 만큼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시원하게 실수해 버리고 미련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하자.라고 굳게 마음먹을 때쯤, 꼭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캄캄한 어둠 속 한줄기 빛 마냥 나를 구원해 줄 화장실을 마주하곤 했다. 그러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 말짱하고 평온한 내 아랫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체의 신비, 알다가도 모를 신기한 불가사의로다.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가 다르다. 물론 내 마음가짐도 달랐다. 하나님, 부처님은 개뿔.. ㅋㅋㅋ
학창 시절, 난 수학이 싫었다. 못하니까 싫었고, 싫어하니 더 못했다. 수학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까 전전긍긍. 앞에 나가 문제풀이를 해야 하는 그 시간은 늘 긴장모드였고, 긴장은 곧 배아픔으로 이어졌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게 하던 수학시간이 사라졌으니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졸업 후 마주한 직장생활에서도 회의나 단독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이면, 반기는 이 하나 없는 그분은 눈치도 없이 어김없이 내 아랫배를 노크했다.
대망의 결혼식 날, 제발 예쁜 드레스 입고 옷에 똥칠하는 일만큼은 없게 해달라고, 중간에 배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이 세상 모든 신들께 얼마나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는지 모른다. '제발 주례사 짧게 해 주세요~ 축가도 1절만 불러주세요~'라고 소리 없이 기도하느라 결혼식 내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 깔았던 나는, 덕분에 결혼식 영상과 사진에서 세상 경건하고 정숙한 다소곳한 신부로 남았다. 다행히 나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지 무사히 결혼식을 마친 뒤로 난 사람들이 왜 종교에 그토록 심취하는지 알았다. 만약 내가 그때마다 종교에 귀의했다면 아마 난 성지순례를 백번도 더 갔을 것이고, 사리가 백만 개는 나왔을 열반의 경지에 오른 불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학교가 집에서 한 시간 이상 지하철로 통학해야 할 만큼 거리가 멀었다. 중간에 반드시 한 번은 내려서 화장실로 뛰어가야 했기에 어느 역이 개찰구를 통과하지 않고도 바로 이어진 화장실이 있는지를 꿰뚫고 있었다. 가끔 부모님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날이면 중간에 반드시 들려야 하는 주유소가 있었는데, 나중에 주유소 직원과 안면을 트고 안부를 물을 만큼 우리 사이는 가까워졌다.
소풍 갈 때도 나는 행여나 버스 안에서 배가 아플까 물조차도 못 마시고 전날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쫄쫄 굶고 있는데, 이것저것 과자며 간식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먹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영화를 보다가 응급신호가 와서 주요 장면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늘 이동하기 쉽도록 일부러 인기 없는 가장 끝자리로 예매했고, 놀이동산에선 몇십 분째 힘들게 줄 서 놓고는, 마치 놀리듯이 막판에 정작 내 차례가 될 시점에 화장실이 급해졌다.
소개팅/미팅 같은 새로운 만남의 자리에는 긴장한 탓에 본의 아니게 입 짧은 소식좌가 되어야 했는데, 데이트 중간에 내가 사라지면 그건 화장실 가는 타이밍, 결혼 후 입 터진 나를 보고 신랑은 놀랐을 것이다. 이토록 잘 먹는 여자였다니..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였던가.. 세상 어디든 잠깐이라도 머물다 가는 곳이라면 그 동네 화장실에 발자취를 반드시 남겨야 하는 여자와 함께 살다 보니 남편은 결혼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여보, 나 배 아파~" 소리와 동시에 화장실을 찾아내는 달인이 되었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
30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과민성대장과 함께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난 어딜 가든 화장실 위치부터 파악하는 습관이 생겼고, 내 소지품 안에는 무조건 휴지가 1순위, 머릿속에 빼곡히 입력해 놓은 시내 곳곳 나만의 화장실 리스트가 자산 1호일 만큼 나와 화장실은 뿌리 깊은 애증의 관계를 여전히 유지 중이다. 이 밖에도 화장실 때문에 벌어진 웃지 못할 해프닝은 10편짜리 장편소설을 쓰고도 남을 만큼 무궁무진하지만 여기에 다 열거했다가는 그동안 애써 쌓아 온 나의 정숙하고 엘레강스한 이미지에 크나큰 타격이 있을 테니 여기서 이만 접도록 하겠다. 유럽여행도 화장실 때문에 다시는 못 갈 지경이니 말 다했지. 여러분~ 유럽에 가시려거든 화장실 찾아 삼만리 하다가 그 아름다운 관광지에서 못 볼 꼴 보이지 말고 그냥 요강을 준비하세요. 그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합니다. 유럽 여행하면서 기억나는 건 화장실 찾기 대장정, 화장실 도장 깨기 미션완료 밖엔 없어요...
흑흑..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많이 발병한다는데 그러면 왜 나를 여자로 태어나게 한 것이냐며 원초적 존재의 이유마저 부정하고 따지고 싶지만, 괘씸죄로 그동안 죽음의 문턱에서 구세주처럼 하사하신 화장실마저 거두실까 두려운 나머지 오늘도 나만의 고요한 외침으로 소리 없이 조용히 울부짖는 중이다.
그렇다면 치료할 방법은 없는 거냐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쉽게도 딱히 없다는 게 첫 번째 문제. 말 그대로 <증. 후. 군 >이라 사람마다 발현증상도, 심한 정도도 제각각이니, 차라리 암 같은 치명적인 병이었다면 일찌감치 관련약이나 치료법이 쏟아졌을지도 모를 일. 또한 원인을 정확히 모르니 예방법 역시 명확하게 없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 이 점이 나를 더욱더 열받게 하지. 아니 대체 어쩌라는 거야..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
온갖 용하다는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도 하나같이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말라는데,
먹지 말라는 거 다 빼고 먹으면 이 세상에 먹을 건 풀때기뿐. 처방약이나 유산균도 한껏 성난 나의 위장을 조금 진정시켜 줄 순 있어도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요인을 다스려야 한다는데, 눈귀 몽땅 닫고 어디 무인도에 나 홀로 처박히지 않는 한 스트레스 안 받고 산다는 게 현대인에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설령 무인도에 있다 한 들 걱정 많고 예민한 내 성격 상, 물고기가 안 잡혀서 스트레스 엄청 받고 있을 게 뻔하다. 고로 스트레스 안 받기란 나에게 있어 '미션임파서블'이란 소리. 그냥 살살 달래 가며 이 세상 더불어 살아가는 수밖에 ..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감사한 건 지금까지는 위급한 순간을 어떻게든 잘 넘기고 길바닥에서 똥칠한 경험까진 안 해봤단 사실.. 그나마 마지막 나의 자존심은 지키고 살고 있다는 점이랄까. 그리고 임신 중 태교로 그 어떤 말보다도 우선적으로 복중 태아에게 했던 말.. 다른 건 몰라도 제발 엄마의 과민성만큼은 닮지 말아라.. 다행히 아들에게서 아무런 조짐이 없는 걸 보면 아직까지는 선방 중인 듯한데 부디 끝까지 반전이 없길 바래..
제약회사들 지금 뭐 하나요? 과민성 대장증후군 완치약 개발하면 그야말로 초대박 일 텐데요..
노벨상 내가 줄게요. 평생 충성고객 될게요. 만들어줘요..
30년이면 강산이 3번은 더 바뀌었을 시간인데 참으로 징글징글한 그분..
우리 이제 그만 좀 헤어지면 안 될까??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