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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 수학을 다시 푸는 어른들

정답이 있는 교실과 정답이 없는 세상

by 뉴욕 산재변호사

어느 신문 기사에서 접한, 어른들이 다시 정석 수학 책을 펼치며 희열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교육의 본질적 목적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원문 기사: https://www.mk.co.kr/news/economy/9485534) 학창 시절에는 입시라는 압박 속에서 억지로 풀었던 문제들이지만, 성인이 되어 자발적으로 이 활동에 몰두할 때 우리는 큰 행복을 느낀다. 이는 심리학의 자발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이 시사하듯, 인간은 외부의 강제가 아닌 스스로 선택한 활동에서 진정한 동기와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 세계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문제들과 달리, 정석 수학 문제에서는 명쾌하고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통제 가능한 영역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안정감을 경험하는데,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통제감이 충족될 때 얻는 심리적 평안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어른들의 이 '수학적 회귀'는 복잡하고 모호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자발적인 통제 속에서 얻는 순수한 만족과 안정감을 상징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이 정석 수학처럼 단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고등학교 시험에서는 '정답' 이 있어야 했기에 하나의 공식과 하나의 해답만을 용인했지만, 어른이 되어 깨닫는 현실은 정답이 없는 미로에 가깝다. 아인슈타인이 작년에 낸 시험 문제를 올해 또 내면서 "그 사이 정답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지식의 영역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유동적인지를 보여준다. 공식과 해답이 명확했던 교실을 벗어나,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재정의되는 문제들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 당혹감은 우리가 교육받은 방식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공식을 도출하는 창조적 과정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보다, 주어진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여 푸는' 훈련에 치중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가진 간결함과 강력함은 인정하지만, 정작 그 공식을 도출해내기까지의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사유 과정에 대해 깊이 고민할 기회는 적었다. 문제를 풀기(Solving)보다 문제를 해결하는(Problem-Solving) 방법을 고민하고, 창의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산재 클레임의 세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법전에 쓰여있는 내용은 문제 해결을 위한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며, 실제 클레임을 진행하며 겪는 수많은 난관과 변수들은 법전에 나와있지 않다. 누군가 의학 교육에 대해 지적했듯이, "의대에서 배우는 것은 의학적 지식일 뿐, 실제 의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은 인간적 스킬, 커뮤니케이션 스킬, 그리고 보험 청구 능력이다." 산재 클레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정답이 없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법대에서 배운 지식보다 문제 해결 능력과 사람을 대하는 통찰력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인공지능(AI) 이 고도화되는 시대는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한다. 이제 공식에 대입하여 기계적으로 답을 도출하는 능력은 AI가 훨씬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수행한다. 인간의 역할은 더 이상 계산기에 있지 않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공식이 없는 문제를 정의하고,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해법을 창조적으로 설계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암기와 공식 적용을 넘어,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탐구하고, 다양한 풀이 방법을 상상하며,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자체를 발명하는' 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에서 잠시 위안을 얻는 어른들의 모습은, 정답이 없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정답인가?'를 묻기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책을 창조할 것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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