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688

업무일지 25년 12월 2일 가을의 끝

by 마법사

이제 제법 블로우질이 늘었다.

정원과 길가에 떨어진 낙엽들을 직접 치우기 시작한 지 1년


비질도 해보고 톤백에 담기만 하다가

블로우 장비를 이용하여 제법 일 같은 일을 해본다


한 주민은 떨어지는 낙엽을 왜 치우냐고 물어오곤 한다.

무심코 지나가는 거리의 낙엽과 공원의 쌓여있는 무더기는

그동안 낭만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내 일거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이 늘어놓은 생명의 엔트로피에

적응하고 있다.

인간이 늘어놓은 욕심과 욕망의 엔트로피도 순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12월 3일 권력의 정점이 흩어지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더딘 것 같지만 결국 흩어진다.


새싹이 나고 성장하고 떨어진다.


처음 블로우질을 할 때는 큰길에 있는 낙엽들을 옆으로 밀어내기만 했다. 나의 커다란 힘으로 가벼운 낙엽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볍게 날려버려 기분이 좋았다


나의 낡고 너저분한 사고와 욕심을 날려버리는 시원함과

깨끗이 드러나는 길을 보며 후회스러운 과거와 깨끗한 미래를

맞이하는 대리만족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 치워진 낙엽은 큰길에 보이지 않을 뿐

옆에서 쌓이고 있고 또 썩어간다

악취가 나고 무거워진다


애써 외면했던 그 더미들을 안쪽에서 큰길로 불어낸다

왜 길을 더럽히냐는 핀잔과 그 길을 지나는 행인에게 불편을 야기해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정원과 놀이터등 여러 갈래의 길과 장애물들 사이로 널려있는 낙엽들을 한 방향으로 불어내지 않는다

길이 나 있는 대로 사방 팔방면 그대로 불어 나가

큰길로 밀어낸다

정원 안에서 오솔길로 오솔길에서 다시 큰길로

큰길에서 한쪽 모서리로 몰아간다


사각면 구석구석에 가득 쌓여있는 낙엽들을 보며

다시 쓸어 담을 생각에 팔이 저며오지만

깨끗해진 정원 흙을 보면 해우(解憂)의 기쁨을 맛본다


하지만 무거운 기계와 강한 진동을 감내해 온 내 육신은

괴롭고 힘들다 피로는 극복되지 않고 게으름은 나를 처지게 하고 홀로 오랫동안 일을 할 때면 나만 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마지막 쓸어 담는 작업을 포기하고 싶을 때 그냥 내일로 미룰까

생각도 했다

그래도 마무리 지어야지 하며 다시 왔을 때

낙엽무더기를 누군가 모두 마대에 담아놓은 것을 보며

세상일은 혼자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각 동 앞에 있던 무더기는 각동 청소 반장님들이

놀이터와 재활용장 근처에는 외각 재활용품 담당 반장님들이

경비초소 근처에서는 경비반장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묵묵히

자기 일도 아닌데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 새 싹이 나고 또 낙엽으로 떨어지겠지

권력이 나고 욕심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처음엔 싱그럽고 영원히 푸르를 것 같던 의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늙고 병들고 치워지지 않는 젖은 낙엽들로

보이지 않는 곳부터 썩어 가고 있겠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내란'이라던지

깨끗한 '청산'이라는 말은 이제 믿지 않으련다

그 어떤 엘리트가 와도 인간이 하는 짓은 반복된다

AI도 인간을 흉내 내서 만든 것이니 그럴 것이고


나는 그냥 내 압가림이나 잘해야겠다

큰 목소리 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믿으며 최대한 곳곳에 숨어있는 낡은 생각과 썩은 욕심을 힘 닫는 데까지 밀어내는 것으로 내 할 일을 하련다



반갑게 새 하얀 눈을 맞이하련다

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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