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機智)의 힘
1981년
스물아홉, 레지던트 2년차
서슬이 시퍼런 전두환 대통령 시절
1979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호실장 김재규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하자
사후 처리 과정에서 전광석화같이 정권을 가로챈 전 장군이 권좌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전국적으로 검거 선풍이 불던 살벌한 때였다.
하루는 판독실에서 열심히 판독하고 있는데 밖에 누가 찾아왔다 해서 나가봤더니 낯선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이라 신분을 밝히며 나한테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 왔다 하였다.
'중앙정보부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무시무시한 기관에서 나한테 볼일이 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이 있든 없든 이런 기관에서 보자는 자체가 살 떨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순간적인 판단에,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서 처리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마침 출타 중인 주임교수님 방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판독실에서 교수님 방까지 걸어가는 2분여 동안 내 머리는 최고조의 회전 속도로 돌아갔다.
'이 자들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나는 교수님 방에 들어가 그들과 응접용 소파에 마주 앉았다.
한 사람은 싱글 정장을 차려입은 오십 대 초반의 젊잖게 생긴 신사,
또 한 사람은 점퍼 차림에 체격이 좋고 날카로운 인상의 30대 초중반의 남자.
그들을 마주한 순간 나는, 내가 대학 입학 하기 직전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집에 돌아오다
길거리에서 네다바이 당한 쓰라린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사오십대의 점잖은 신사와 이삼십 대의 날카로운 청년.
'어쩌면 이렇게도 같은 조합이냐? 사기꾼이나 수사관이나.'
신사가 물었다.
“이웅재를 아십니까?”
그의 입에서 웅재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들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나의 고교 두 해 후배로서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로 진학한 후
당시 한창이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감옥살이까지 한 친구다.
“왜 그러시는지요?”
“그냥 묻는 말에 답만 하세요. 압니까 모릅니까?”
이제부터 상황판단을 잘해야 한다.
이들은 분명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왔다. 함부로 거짓말을 하다가는 당장 탄로난다.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고등학교 후밴데 몰라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선배가 후배 좀 안다고 그것도 죄가 되나요?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세요. 자꾸만 남의 이야기하듯 하지 말고."
일단 공격적으로 치고 나갔다.
처음부터 수세에 몰려 이로울 게 없고, 그들의 의도를 빨리 파악하려면 즉각적인 답변 대신 그들처럼 질문으로 응수하는 게 상책일 것 같아서다.
"그럼 좋습니다. 이웅재는 지금 우리 기관에서 수배(手配) 중인데 그의 주변 인물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선생님 이름이 나오더군요."
흐음, 이제야 알겠네. 이들이 어떻게 나를 찾아오게 되었는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놈이 내 이름을 불었단 말인가? 웅재와 나 사이를 알고 내 이름까지 알 만한 사람은 몇 명 안 될 텐데.
"지금부터 그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얼마나 자주 만난 사이인지 소상히 말해주시지요."
그를 나에게 소개해 준 사람은 고교 한 해 후배이자 의대 후배인 방헌기였다.
웅재는 한 해 재수하여 고등학교에 들어오는 바람에 헌기의 후배가 되었지만 실은 헌기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들은 나와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라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어렵게 학교에 다녔고, 그 당시에는 조그만 방을 하나 빌려놓고 고교생들을 상대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헌기가 "형, 오늘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하니 수업 후 한잔합시다." 하길래 나는 그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구경도 할 겸 해서 약속 시각보다 이른 시간에 그 공부방엘 갔다.
영어에는 도무지 재주가 없는 헌기는 수학을 가르치고 웅재는 영어를 가르쳤는데 둘 다 실력꾼이었고 둘 다 잘 가르쳤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저렇게 자신들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하여 그날의 장면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수업을 마친 후, 연년생처럼 차이나는 선후배 셋이서 취하도록 막걸리를 마시며 의기투합했다.
그 이후로 나는 웅재와도 친하게 되었고, 재수하여 연세대 정외과로 진학한 웅재는 방학 때면 내려와 헌기와 셋에서, 때로는 헌기가 없어도 나와 만나고 갔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그는 항상 군부 체제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하며 입에 거품을 물었고
그런 그에게 나는 한국의 안보 상황을 거론하며 거센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재학 중 학생운동으로 투옥되어 1년여 옥살이도 하고, 학교에서는 퇴학도 당하고,
몇 년 후 다시 복학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방헌기의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공중보건의 신분에 뒷배경이라고는 없는 헌기는 어떤 심한 고초를 겪게 될지 모른다.
나는 어려서부터 추리소설과 첩보물을 좋아했다.
조그만 단서 하나로 범인을 추적해 들어가는 그 과정이 내 적성에 딱 맞았고 현장 첩보원들의
기상천외한 접선 방법과 위기 탈출 방법에 매료되었다.
게다가 나는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 같은 사람, 스파이 시켜주면 잘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스파이가 되어 잡혔을 때 어떻게 둘러대고 빠져나올지에 대해 연습을 해보기까지 했다.
이제, 그들이 나를 믿게 만들려면 그럴듯하게 꾸며대야 한다.
그러려면 열 마디 중 아홉 마디는 사실대로 말하고 결정적인 한 방만 구라로 섞어 넣으면 된다.
"대학 다닐 때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되었는데, 그 후로 방학 때 한 번씩 부산 오면 연락이 와 술 한잔하곤 했지요. 아이고 그노무 자석,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지요? 이렇게 수배까지 당하고 있는 걸 보니.
내가 항상 그랬지요. 지금이 데모나 할 때냐고. 괜히 계란으로 바위 치지 말고 학생 본분에 맞게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위의 말 중, 첫 문장 앞부분만 거짓이고 나머지는 전부 사실이었다.
"처음에 우연히 술집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일행 중에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 같이 어울렸겠지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역시 수사관은 달랐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연막을 피웠더니 바로 정곡을 찔러 들어온다.
질문은 그 신사만 했고 젊은 친구는 틈틈이 내 진술을 노트에 기록하면서
내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놓칠세라 처음부터 끝까지 독수리 같은 눈으로 내 얼굴과 몸동작만 쏘아보고 있었다.
내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아니요, 내가 아는 친구는 없었어요. 보시다시피 내 몸이 이렇다 보니 누구나 나를 한 번만 봐도 대충 기억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의 일행 중 한 명이 내가 선배인 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해 와 같이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후 그와 만날 때는 항상 혼자서만 만났나요?"
"예, 걔는 외톨인지 어쩐지 모르지만 나 만날 때는 항상 혼자 나왔어요. 무슨 간첩 접선하는 것도 아니고.
하기사, 지하고 나는 두 해나 차이나는 선후배 사인데 어찌 나 모르는 친구를 데리고 나오겠습니까?"
"제일 최근에 만난 것이 언제입니까?"
"지난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그동안 분명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테니 그의 연락처를 말해주시지요."
"연락처요? 그런 건 몰라요. 지가 부산 내려오면 어쩌다 한 번씩 병원으로 전화가 와서 만났지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한 적은 없어요. 서울 있는 애한테 그럴 일도 없고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그와 가장 친한 친구 이름 하나만 불러주시지요."
클라이맥스였다.
그들의 목적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를 족쳐서 뭔가가 안 나오면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
내가 전혀 모른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만나 오면서 본인의 주변 인물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지가 친하다는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보자~ 걔 이름이 뭐더라? 거, 이 머시긴데.
성은 분명 이 씬데~ 이름이 뭐더라~~~?"
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포즈를 취했다.
"아, 거참, 입에서 뱅글뱅글 도는데 잘 안 나오네."
이제 마무리할 시간. 더 이상 시간 끌 여유가 없다.
꼬투리 잡히기 전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약간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저, 환자 판독하다 말고 나왔거든요. 지금쯤 판독 안 나온다고 외래에서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 이름 갑자기 떠올리려니 생각이 잘 안 나는데 나중에 생각나면 연락드릴 테니 연락처나 하나 주고 가시지요."
둘 다 반신반의하는 눈치였고 신사 양반은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영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에 대한 뒷조사는 이미 다 하고 왔을 터.
그들이 오늘 족치려던 상대는 이 나라 고위 관료 출신의 아버지를 둔, 신분이 확실한 국립대학병원 의사인 데다 피의자도 아닌 것을.
마지못해 일어서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요나라~, 안녕히 가시고 다시는 오지 마시라요!'
Epilogue
당시, 내가 끝까지 불지 않았던 헌기는 무사했다.
그는 공중보건의를 마친 후 G.P.(General Physician,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로 바로 개업하였고, 몇 년 전 은퇴하고 손주들 돌봐주며 산다.
웅재는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 후 부산에 내려와 전향 각서를 쓰고 한 사립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훗날 그는 보수당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내가 영구 회장으로 있는 은하수회에 들어와 동요도 불렀다가 공기업 사장도 되었다가 그 후로는 연락이 없고 언론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한편, Evidence based logical approach(증거 기반 논리적 접근)가 필수적인 영상의학자가 된 나에게는 어릴 적부터 즐겨 읽은 추리소설과 첩보물 소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 날의 경험은 그로부터 20여 년 후 얽히고설키게 될 한 악질 부패 사기꾼 형사와의 대결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