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의미
2022-06-04
온가족이 경주에 모였다. 명목은 '칠순 기념 가족여행'.
지금껏 나는 생일날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지라 처음엔 "칠순이 뭐 대단하다고.." 하며 그냥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하였다.
하지만,
칠순을 그렇게 넘길 순 없다며 뭔가 기억에 남을 기념행사라도 가져야 한다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왕 그럴 거면 손님들 청하는 행사 대신 2박 3일 정도 우리끼리 가족여행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여 그리된 것이다.
이 나이 되니 자꾸만 옛일이 되돌아봐 지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한 추억은 뭐니 뭐니 해도 즐거운 가족여행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직 건강하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집을 떠나 가족과 함께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날 행사를 위해 아이들은 경주에 있는 '누아르 블랑(NoirBlanc)'이라는 풀빌라를 한 채 잡아놓았다. 입실은 오후 3시인데 자기들은 미리 가서 준비할 게 있으니 우리보곤 좀 늦게 도착하란다.
논밭 가운데로 난 외길을 따라가니 2층짜리 큰 빌라 두 채가 나온다. 우리가 들어갈 블랑(White란 뜻)은 아래쪽에, 누아르(Black이란 뜻)는 위쪽에 있고 주변 경관은 볼 게 아무것도 없으나 집 자체가 멋져 보였다.
빌라 안에 차를 대니 옥외풀장에서는 아이들 물놀이가 한창이고 며느리와 딸은 식탁을 중심으로 생일 축하 데코레이션에 여념이 없었다.
아내와 나는 빌라의 1층 제일 안쪽에 있는 트윈베드룸에 짐을 풀고 난 후 방안에 비치된 안마의자에 앉아 쉬면서 마주 보이는 풀장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광경을 느긋이 즐겼다.
저녁 식사 및 행사
오후 6시쯤 되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와 거실로 나갔더니 거실 벽에는 장식용 풍선들과 함께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렸고 그 위에 쓰인 문구는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영웅 아버지
쉼 없이 달려오신 세월을 존경합니다.
청춘을 바쳐 가족이라는 꽃을 피우셨으니
그 꽃들이 남은 인생 꽃길 만들어드릴게요.
항상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식탁에 앉아 상차림을 보니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콩나물 무침과 함께 나온 아귀수육에,
부추무침을 곁들인 소꼬리 찜에,
부추천 대구전 오색 꼬치전에,
파절이를 곁들인 육전에,
고추장 보리굴비까지.
아들이 우쭐거리며 자랑스레 말한다.
“아빠, 이거 다 윤정이가 직접 만든 거예요. 밀키트 제품도 사용 안 하고 오늘 새벽 3시까지 만들었어요.”
참 대단하다. 저걸 혼자서 다 했다니!
맛이라면 내가 또 한 입맛 하는 사람인데, 한 점씩 맛을 보니 맛없는 게 하나도 없다.
어쩌면 저 나이에 이렇게까지 맛을 낼 수 있단 말인가?
대장금은 가고 최장금의 시대가 온 것 같다.
생일파티
식사가 끝나고 칠순 세레머니 순서가 되자 식탁 위에 멋진 케이크와 함께 정체불명의 종이 꽃바구니와 애드벌룬 장식물이 놓였다.
전등을 끄고 촛불에 불을 붙인 후, 가족들의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내가 입김으로 촛불을 불어 끄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애드벌룬 형 장식물을 바닥으로 내린 아들이 나더러 그 꼭대기에 있는 리본을 풀라 해서 풀었더니 갑자기 애드벌룬이 위로 떠 오르면서 5만 원권 지폐가 줄줄이사탕처럼 매달려 천정으로 치솟아 오른다.
그리고, 옆에 있는 꽃 상자의 뚜껑을 잡아당겨 보라 해서 당기니 그 속에서도 돈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곧이어 아들이 축하 인사와 함께 줄줄이 돈사탕을 내 목에 걸어주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이벤트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 아들은 준비해 온 스파클링 와인을 따고, 며느리는 그에 맞는 안주를 만들어 상에 올린다.
안주 또한 범상치 않은 솜씨다.
다들 잔을 채우고 건배와 함께 나의 감사인사가 있고 난 뒤 나의 첫 손주 '한결'이 마이크를 잡고 축사를 낭독했다.
할아버지 일흔 번째 생일 축하드려요.
다리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걸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랑 싸우지 말고 사세요.
할아버지 계셔서 저희도 행복하게 잘 지니고 있어요.
할아버지 항상 건강하세요.
그런데 봄이는 할아버지 성격 닮은 것 같아요.
I love you
평소, 여성성이 강하고 유순한 손자 결이가 여장부 같은 기질의 동생 봄이를 버거워하더니 끝내 축사 말미에 <그런데 봄이는 할아버지 성격 닮은 것 같아요>라는 말로 할애비에게 한 방 날려 다들 배를 잡고 넘어갔다.
한 씨 가문 사람들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래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멋진 세레머니에, 맛있는 음식에, 달콤한 와인에, 함박웃음이 피어나는 즐거운 대화에,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그렇게 그 밤은 흘러갔다.
내 생애 최고의 생일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