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좋은 점
2015-02-22
구정 연휴가 끝나 아이들이 다 돌아 간 날, 피곤해서 9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자다가 눈이 떠져 물 한잔 마시고 화장실 갔다가 누워서 휴대폰을 보니 12시 좀 넘었다.
방문 틈 사이로 불빛이 새들어오는 걸 보니 아내는 아직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더 자야지.' 하고 잠을 청했지만 잠이 안 온다.
이럴 땐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는 걸 경험으로 터득한 바 거실로 나갔다.
눈이 부셔 눈을 반쯤 뜨고 인상은 잔뜩 찌푸린 채 양손에 이불과 베개를 들고 갑자기 강시처럼 등장한 나를 보고 아내가 놀라 묻는다.
"여보, 자다 말고 왜 나왔어요?"
"응, 잠이 안 와서.... 여기 좀 누웠다 잠 오면 자고, 안 오면 글 쓰다가 자려고."
그 편한 Lazy Boy 소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거 위에 전기장판 깔고, 그 위에 얇은 요대기를 깐 거실바닥에 누워 TV를 보는 아내 곁에 누워 눈을 돌리니 마침 나도 즐겨 보는 ‘동치미’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온 이야기의 주제는 ‘남편이 아내 몰래 눈물이 날 때’ ‘자신의 외로움을 몰라주는 무심한 남편 때문에 다른 남자가 생각날 때' 등, 살면서 위로받고 싶을 때에 관한 것이었다.
아내가 묻는다.
"여보, 당신은 요즈음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위로받고 싶을 때 없어요?"
"아니."
"참말로?"
"그럼."
"마누라가 그래 잔소리하고 때로는 원망을 쏟아내는데도 어디 가서 위로받고 싶은 적 없어요?"
"물론 때때로 화는 나지. 하지만 다 받아낼 만하니 견디지."
"당신 참말로 강한 사람이다. 당신 괜히 강한 척하는 거 아니가?"
"어허이, ~척할게 따로 있지 이 나이에 무슨 그런 것 허세부리간?"
"그거 다~ 당신 자존심 때문이지?"
"어허이, 자존심은 무슨 자존심!"
"그러니 아이들도 엄마 안 됐다는 말은 해도 아빠 안 됐다는 말은 아무도 안 하지.
사람이 때로는 측은지심이 들 때도 있어야 하는데.."
"내가 미쳤나? 아이들한테 동정받게!"
"거 봐! 저게 자존심 아니고 뭐꼬? 아니면 당신 기질이 너무 쎄서 그렇나?"
"물론 내 기질도 쎄고 자존심도 강하지. 하지만 그런 것만 가지고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다 보니 설(說)이 길어졌다.
"당신 알다시피 내가 두 살 때 소아마비 앓아가지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거부당하고, 세상으로부터는 불공정한 게임 강요당하다 보니 모든 걸 투쟁을 통해 나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지요.
그런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는 동안 투쟁심은 나날이 커져만 갔고, 장애물이 있으면 들어내야 했고, 누구든 내 앞을 가로막고 서면 쳐서 쓰러뜨려야 했고... 그러는 동안 참 피눈물 많이 흘렸지.
하지만 그 모든 것 다 이겨냈고, 이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자신감까지 생겨 다른 건 몰라도 누가 나를 무시하거나 내가 불쌍해 보이는 건 마~ 못 참는 거라."
갑자기 아내가 내 손을 덥석 잡고 흔들면서
"당신 참 대단하다 대단해. 존경스럽소!"라고 말한 뒤 조금 있다가 하는 말.
"그런데 원래 강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힘없고 풀 죽은 모습 보이면 참말로 더 불쌍하게 보이겠다."
"내가 그런 모습 보이면 저 양반 이 세상 하직할 때가 다 됐구나 하고 생각하면 돼."
"그게 어디 마음대로 돼요? 내사 마~ 요양병원에 누워있을 상황 되면 아무것도 안 먹고 굶어서 그냥 그대로 사그라질 거라. 그런 건 나 자신 있어요. 한데 당신은 다른 건 다 참아도 배고픈 건 도저히 못 참으니 굶어 죽지도 못하고 우짜겠노?"
"그 말도 맞네. 그것 참. 연구할 거리 하나 더 생겼구먼."
2023년 3월 11일
그동안 난 너무 강하게만 살아왔다.
그러다 나이 50줄에 들어서자 더 이상 투쟁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오로지 가르쳐야 할, 돌보아야 할, 이끌어줘야 할, 사랑해야 할 대상만 남았다.
그래서 이제부턴 강하게 살기보단 유하게 살고, 이기는 삶보단 져주는 삶을 살아야겠다 생각하고 나름대로 꾸준히 노력해 왔다. 하여, 지금은 과거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졌고 기(氣)도 많이 꺾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그런 말을 듣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나를 만나본 제자가 다른 제자에게 한 말이 내 귀에 흘러들어 왔다.
"한 교수님, 요새 완전 이빨 빠진 호랑이 다 됐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이제야 뭔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에 참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요즈음은 젊은 이들로부터 내 첫인상이 인자한 할아버지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그러자 호기심이 생겼다.
'사람이 변하면 얼굴도 변한다는데, 내 얼굴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래서 몇 십 년 동안 모아놓은 내 사진 파일들을 뒤져서 비교해 보았다.
"그러네, 확실히 다르네!"
젊었을 적 사진 속에는 대부분 눈이 매섭고 입매가 날카롭고 카리스마 넘치는 한 싸나이가 있는데,
요즈음 사진에는 속 없이 흐물흐물해 보이는 웬 할배가 한 명 등장한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부분을 탁 건드리면 옛날 썽질이 그대로 머리를 쳐들면서 '야이 썅!'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바로 올라오니 이 일을 우짜면 좋노?
물론 예전과 비교했을 때 이런 일의 빈도는 훨씬 줄었고, 쳐든 대구리 원상회복하는 시간도 몰라보게 빨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무시당하는데 대한 분노',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데 대한 분노',
이들이야말로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다.
이들은 과연 어디서 기인했을까?
그건 분명 나의 타고난 기질에다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는 과거의 상흔(傷痕) 때문이리라.
아이고~, 한 도(道) 통할라믄 아직 멀었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이만큼 변해온 걸 보면 희망은 있다.
"그래, 더 유해지고 더 휘어져야제. 자존심 좀 상하면 어떻고 무시 좀 당하면 어떻노! 그게 뭐라꼬. 안 그렇나?"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대문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