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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ul 20. 2024

인IV21 상사의 마음, 부모의 마음

"경은아, 미안하지만 퇴근길에 우체국에 들러 책 한 권 보내 줄래?"

"죄송하지만 오늘은 점심때 약속이 있어 안 되겠는데요."     

비록 개인적인 부탁이긴 하지만 부하직원으로부터 단칼에 거절당하고 나니 순간적으로 살짝 서운하려 했다.   


"어디, 중요한 사람이라도 만나는 모양이지?"

"아, 예. 오늘 어머니와 함께 기장 쪽으로 갈 일이 있어서요."     


"기장이라, 그럼 점심은 횟집에 가서 회를 먹어야겠구먼. 장소는 정했고?"

"가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려고요."     


"그럼 말이야, 바닷가를 따라 죽 가다 보면 연화리에 '해담'이라는 맛집이 있다. 거기는 회도 좋고, 해산물 모둠도 좋고, 전복죽도 좋은데, 마지막에는 꼭 '해물라면'을 먹어봐라. 그 안엔 큼지막한 전복이 한 마리 통째로 들어있고, 알맹이 굵직한 담치도 10여 마리 들어있고, 다른 조개와 해산물도 들어있어 정말 먹을 만하단다."

"야, 맛있겠네요. 교수님,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인사하고 가려는 찰나, 다시 돌려세워 말했다.     


"아 참, 그 집도 좋지만, 마~ 점심은 청사포에 있는 '착한횟집'에서 먹는 게 좋겠구나. 그 집은 내 오랜 단골이라 내가 사장에게 부탁하면 잘해줄 거라. 그리고 거기는 청사포 끝 집인지라 주차장도 널찍하고, 바로 옆에 해상 전망대도 있고, 테라스에는 포장마차 방갈로도 있어 거기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 끝없는 수평선에 속이 다 확 트인다. 그리고 계산은 나중에 내가 대신하면 되니까 어머니 모시고 마음껏 먹어."     


그러자 경은이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며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교수님, 죄송해서 어떡해요!"     

"야 이 사람아, 그만한 일로 네가 내게 죄송하면 나는 매일 너에게 죄송해야겠네. 이건 내가 너를 대접하는 게 아니라 네 어머니께 대접하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거라. 그러면 네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경은이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단 말을 반복한다.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거기 가면 생선회, 조개구이, 장어구이가 있으니 골고루 시켜서 다 맛보고, 조개와 장어 구워주는 직원에게는 수고했다 하면서 이 돈을 팁으로 주려무나. 그리고 혹시 나 아는지 물어보고 안다 그러면 내가 안부 전하더라고 말해 줘. 아무튼, 어머니하고 의논해서 그 집으로 갈 것 같으면 나한테 즉시 전화해라. 그러면 내가 사장한테 잘 부탁해 놓을 테니."     




한 시간쯤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 청사포에 다 와 간다고.

나는 바로 횟집 사장에게 전화해서 내 직원과 그 부모가 가니 항상 내가 앉는 자리로 안내하고 잘 대접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계산은 나중에 내가 할 터이니 식사 끝나고 나면 음식값과 입금할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 달라 하였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경은이에게 전화했다. 

내가 전화한 이유는 그 어머니에게 딸내미 칭찬 좀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어머니 바꾸라 해서 참 훌륭한 딸을 두셨다고 말해줄 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경은이는 폰을 받지 않았다. 

아마 출근할 때 무음으로 해 놓은 걸 깜박했나 보다. 


좀 있으나 내 폰으로 계산서와 계좌번호가 문자로 왔다.

금액이 4만 4천 원 밖에 안된다. 먹은 거라곤 조개구이(소)와 라면이 전부다.


내가 놀라 사장에게 전화해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래 말입니다. 손님이 그것만 시키니 제가 뭐라 할 수도 없고….” 하며 아쉬워한다.     


‘아뿔싸!, 얘가 연화리 해담의 ‘해물라면’을 이 집 라면으로 착각했구나.‘     


곧이어 경은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좋은 하루를 선물해 주었다는 말에 나는 참으로 흐뭇했다.    

  


    

다음날, 경은이는 출근하면서 뭔가를 들고 내 방에 왔다.

“어제 그 횟집에서 나와 바닷가를 걸어가는데 디저트 카페가 보이자 어머니는 교수님께 너무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그 집에서 나름 시그니쳐 급 디저트를 사서 교수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봉지를 열어보니 먹음직스럽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빵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고, 뭐 한다고 이런 걸 다 사 보내시고. 괜히 부담을 지웠구나."


경은이가 나간 후 횟집 계좌로 돈을 입금하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답이 왔다.


내용을 보아하니 발신인은 사장이 아니라 어제 그 테이블 서브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평소 나를 익히 알고 있는 종업원인 모양이다.  


어제 팁과 안부 인사를 전해 받은 후 바로 내게 전화했지만 통화가 안 되자 오늘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걸 보니 경위가 바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Epilogue     

전임강사 시절, 어머니를 모시고 신경외과 외래에 진료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외래를 보신 분은 평소에 내가 존경하던 김수휴 교수님이셨다. 

내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소개하자 교수님은 어머니께 인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참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이 예상치 못한 교수님의 한마디에 어머니는 “아이고, 아입니더.”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순간적으로 내 눈에 포착된 어머니의 그 흐뭇해하시던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교수님의 그 한마디는 내게도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기에 나 역시 경은이와 그 모친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나의 이 자그마한 나눔이 한 모녀에게 멋진 하루를 선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지의 한 종업원에게까지 뜻하지 않은 반가움을 선사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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