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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un 16. 2024

인IV20 한국 야구 비사(祕史)


어떤 대화


아내가 묻는다.

“이제 어디까지 썼어요?”      

“아직 국민학교도 졸업 못 했는데..”     


“아니, 아직도 어린 시절 이야기예요? 아이고 날세겄다 날세겄어.

이래 가지고 언제 끝나겠노? 몇 페이지 썼는데요?”

“육십 페이지.”     


“그럼 책으로 하면 몇 페이지나 되는데요?”     

“150 페이지 정도 되겠지비.”     


“아니, 국민학교 졸업도 안 했는데 150 페이지 나가믄, 도대체 책 한 권이 몇 백 페이지나 되겠노?

대학은 또 오죽이나 별나게 다녔나? 대학시절 들어가믄 그것만 해도 책 한 권은 나오겄다.”     

“어허~이, 거 자꾸 김새는 소리 좀 하지 말라우! 옆에서 자꾸 그런 소리 해싸믄 글이 제대로 안 나와요.

그러니 이제부터 내 글에 대해서는 눈 닫고 입 닫고 있다가 책 나오고 나면 그때 보시라요.”      


“알았시요.”     


'그래, 맞다.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九萬里) 같은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겠나? 이제 그만 중학교로 넘어가자’ 했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중요한 일이 하나 문득 떠올라 아무래도 이 이야기 하나만 더 하고 넘어가야겠다.



한국 야구 비하인드 스토리     


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것이었다.

나도 남들처럼 운동을 하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축구가 제일 하고 싶었지만 뛰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야구였다.   


야구는 서서 공만 던지고 받고 방망이로 치기만 하면 되니 이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싶어 아버지께 글러브와 야구공, 그리고 야구 빳다(bat, 야구 방망이를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를 사 달라하여 처음에는 형들과, 그  후에는 친구들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점점 간이 커져서 아이들을 모아서 동래 야구단을 하나 만들어 내가 투수 겸 주장이 되어 다른 동네 아이들과 시합도 하곤 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투수로서 던지고, 타자로 나가 치는 건 되는데 치고 나서 뛸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쩌누?

그렇다고 해서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그 짜릿한 맛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때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그 난제(難題)를 한 방에 해결해 주었다.

‘까짓 거, 나 대신 다른 아이를 뛰게 하면 되지. 흐흐’


그 후 다른 팀과 시합을 할 때면 ‘나는 치기만 하고 뛰기는 다른 사람이 뛴다’는 협약을 먼저 맺고 붙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대타(pinch hitter)나 대주자(pinch runner)란 말 자체가 없었고 그런 제도는 한참 후에나 생겨났다. 그러니 한국야구사를 쓸 때 이 말은 꼭 좀 넣어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대주자 제도가 최초로 시행된 때는 1963년으로서 부산 동래에 있는 내성국민학교 어린이 야구단에 의해서인데,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당시 5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상석’이란 장애인 학생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무튼, 지금 생각해 보면 어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러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보고 뭐라고 수군거렸을까?

아무래도 내가 어떤 면에서는 낯짝이 좀 두꺼운 데가 있는 있긴 있는 모양이다.


하기사,

그러니 이 몸으로 여태 살아남았겠지...     




#표제사진 출처: 김준호 글/용달 그림/책고래출판사 「 대주자」 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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