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사이에는 25년이라는 시차(time gap)와, 백악관과 나이트클럽이라는 격이 다른 무대(stage gap)와, 국가적 귀빈과 술집손님이라는 청중의 품격(audience gap)과, 대통령과 대학교수라는 신분 차이(social level gap)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가로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악관 만찬 영상을 보면서 프랑크프루트의 밤이 오버랩되어 왔던 것은 '둘 사이에 참 닮은 점이 많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리 닮았을까?
1. 돌발적 상황
윤 대통령이나 나나 예정된 수순에 따라 노래하게 된 것이 아니란 점이 닮았다.
나는 매니저의 무례한 행동에 열이 받아 술김에 무대로 나갔고, 윤통은 바통의 조크를 진담으로 받아들여 얼떨결에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2. 반주가 따라오지 못했다.
La Novia를 부를 때, 사전에 내가 그렇게 코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주는 아예 따라오지를 못해 나는 반주 없이 아카펠라로 불렀다.
윤통께서 노래를 하겠다고 마이크를 잡자 피아노 주자는 key(음 높이)가 이 정도면 되겠냐는 듯 기본코드를 누르며 노래 첫 음을 목소리로 내주었다. 그러자 윤통은 잠시 뜸을 들인 후(아마 속으로 그 음을 내보았겠지), 바로 노래를 시작했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반주자는 노래를 리드하기는커녕 음정이 바뀔 때마다 겨우 코드만 한 번씩 짚어주어 윤통 역시 아카펠라 수준으로 불러야 했다.
만약 윤통의 노래가 사전에 예정된 수순이었다면 바로 전주가 나와 노래하는 사람을 리드했어야 했다.
3. 예상외의 열광적 반응
백악관에서나 프랑크프루트에서나 관객들이 보인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라 할 만큼 뜨거웠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대통령이란 사람이, 그것도 동양인이, 미국의 국민가요를 저렇게나 맛나게 부른다는 사실에 껌벅 넘어갔고, 다른 한쪽에선 의대교수란 사람이 클럽무대에 나와 서양노래를, 그것도 영어 노래에다 이태리 노래까지 자신들을 능가할 만큼 부른다는 사실에 홀까닥 빠진 것이다.
(내가 라노비아를 앙코르곡으로 고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런 자리에 나와 노래를 한다는 자체가 상상을 초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원래 음악가가 아닌 사람이 남 앞에 나가 혼자 노래 부르는 문화가 없다.
하지만, 한국은 잔칫집이든 회식 자리건 아무나 노래시키고, 누구나 한 곡은 불러야 하고, 노래 안 시켜주면 오히려 섭섭해하는 나라다.
서양인들이 유머와 조크가 특기라면 한국인은 노래와 춤이 특기다.
음주가무(飮酒歌舞: drinking, singing & dancing)라면 한국인을 따라올 민족이 없다.
오늘날 B.T.S나 블랙핑크가 그냥 탄생한 게 아니다.
바통이 실수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는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는 그 못 말리는 '흥'이란 기운을 몰랐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에게 총을 쥐어주면 누구나 명사수가 되고 총을 분해·조립까지 하듯,
한국에서는 "노래 일발 장전!"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입을 통해 바로 노래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바통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양인의 특기를 살려 멋진 조크로 청중을 웃겨볼 심산으로 "노래 한 곡 하실라우?" 하고 애드리브를 쳤는데 윤통께서는 한국인답게, 모두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래로 받아쳐 세계를 놀래킨 것이다.
4. 음악과 함께 보낸 고난의 시기
나는 의대 6년 동안 두 번 낙제하여 대학을 8년이나 다녀야 했다.
의과대학에서 한 번 낙제하면 그나마 "그럴 수도 있지. 안됐다야." 하며 다소 동정 어린 눈길로 보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두 번 낙제하면 '구제불능 낙제 전과자'로 영원히 낙인찍힌다.
내가 첫 번째 낙제했을 땐 부모님에게 죄인 되었지만. 두 번째 낙제하는 순간부턴 주변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하류인생 취급받으며 비웃음과 우려 섞인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그 당시의 괴로움이란....
윤통은 고시에서 여덟 번이나 낙방했다.
나는 꼴랑 두 번 낙방하고도 그런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했는데 그분은 무려 여덟 번이다!
그 세월,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동안 마신 소주가 몇 트럭이며, 그동안 씹어 돌린 오징어 다리가 몇 박스며, 그동안 불러재낀 노래가 몇 자루며, 갈려나간 이빨의 마모도는 또 얼마나 될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은 이런 때를 위해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5. 하지만, 이루었다.
본과 수업시간에 한 교수가 말했다.
"한 번이라도 낙제한 사람은 앞으로 교수로 남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교수 자격 없다."
수업에 들어온 학생 중 한 번이라도 낙제한 사람이 열명쯤은 될 터인데, 그런 학생들 앞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그때 나는 이를 갈았다.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그리고 나중에 나는 대학 교수가 되었고, 한 번도 그 말을 잊어본 적 없고, 최고봉에 올랐다.
윤통 역시 동기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겠나?
명색이 서울대학 출신들이다. 동기들은 다들 검사, 판사, 변호사 달고 한참 잘 나갈 때 혼자 머리 싸매고 암자와 독서실을 전전하며 겪었을 그 심적 고통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결국은 고시 합격하고, 검사가 되었고, 검찰총장이 되었고, 당시 잘 나가던 동기들이 올려도 못 볼 대통령이란 자리까지 올랐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보여준 저 결단력과 추진력과 배짱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그건 바로 그의 타고난 기질을 그 인고의 세월 동안 갈고 닦고 다듬어 길러낸 내공아니겠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의 묘미
그렇게 음악에 빠져 두 번씩이나 낙제하며 '구제불능 딴따라'란 낙인이 찍혔던 나.
하지만, 그렇게 고난의 수렁텅이로 몰아넣은 그 음악이 나중에 나를 스타로 만들어줄 줄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지금껏 sound man으로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에는 Ultrasound(초음파)로 세계를 주름잡았고, 밤에는 Music sound로 스타가 되었다.
한국에서 개최한 국제학회 환영만찬장에서 두 번 무대에 섰고, 대학 시무식 축하 공연 무대에도 서고, 재단 이사장 생신축하연에서도 단골로 축복송을 불렀다. 그리고 야간업소를 휘어잡았다.
윤통 역시 학창 시절부터 가장 즐겨 불렀던 노래가 40년쯤 후 그 노래의 본고장인 미국에 가서, 그것도 백악관 만찬장에서 그렇게 엄청난 파워를 발휘할지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게 바로 인생의 묘미다. 아무런 연관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던 사건 하나하나가 먼 훗날 서로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