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11 남이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의 의미

by 한우물


나를 찾는 환자들

병원을 옮긴 지 한 달이 넘어서던 어느 토요일, 전에 근무하던 병원의 방사선사로부터 카톡 문자가 욌다.


「교수님! 잘 지내고 계세요?ㅎㅎ 1병원은 좀 어떠신가요?!

저희는 환자들 중에 교수님 찾으시는 분들이 꽤 있으세요.

교수님 보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구요 ㅎㅎ

물론 저희도 보고 싶답니다��

결혼한다고 말씀드렸었는데 벌써 다음 달이에요☺

모바일 청첩장 나와서 보내드립니다�

요즘 너무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구 언제나 건강하세요❤」


참 기분이 좋았다.

떠나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나를 찾는 환자가 꽤 된다니!

게다가 내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환자까지 있다니!


외래에서 직접 환자를 보는 임상과라면 몰라도, 나처럼 그들의 의뢰를 받아 검사만 해 주는 영상의학과 의사를 찾는다는 건 참 쉬지 않은 일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나의 초음파 진단에 대한 신뢰와 그동안 다른 곳에선 경험해 보지 못한 색다른 스캔방식과 꼼꼼한 검사에 대한 만족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보고 싶다는 말까지 하는 환자는 검사를 마친 후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면 병이 재발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상담을 해 준 환자들일 것이다.


아무튼, 환자가 자신을 진료해 준 의사를 기억하고 찾았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의사 된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내 이름을 불러준 의사

바로 다음 날, 석 선생으로부터 오랜만에 카톡이 왔다.

그는 2023년, 나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던 가정의학과 선생으로서 약 한 달간 아침 8시부터 짬만 나면 초음파실에 와 내가 하는 초음파 검사를 참관하고 내가 전수해 주는 노하우를 배운 후 대구 근처에서 개원한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 아침 부산 롯데 호텔에서 하는 강의를 듣는 중에 강사로 나오신 대구21세기내과 신이철 원장님께서 초음파 잘하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지금은 대학에 있다가 은퇴하신 한상석 교수님이 강조하시는 방법인데,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시더라구요.

저 또한 교수님께서 하시는 거 보고 배우다 보니 더욱 반갑고,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그러면서 그는 강의 도중 연자(speaker)가 화면에 띄운 PPT 사진 한 장을 폰으로 찍어 보내왔다.


석지환 - 초음파 강의화면 촬영.jpg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옛 생각들이 떠오르며 감회에 젖었다.


-복부초음파검사 시 등받이 세우는 방법의 중요성-

이것은 내가 최초로 개발한 방법으로서 나는 1980년대 초중반부터 그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는데 위의 ppt 사진은 배경 사진만 다를 뿐, 과거 내가 해오던 강의 슬라이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등받이 올리기 - 배개 이용.jpg
등받이올리기, 왼쪽 오른쪽 들기.jpg


그로부터 40년 후, 그것도 영상의학과가 아닌 타과 의사가, 자신의 강의에서 이 점을 강조하면서 내 이름까지 밝혔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가르치는 자의 보람을 오랜만에 맛보게 해 주었다.


죽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

이틀에 걸쳐, 나를 찾는 환자들이 있고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 의사가 있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야~ 이 한상석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네!"


그건 아마도 스스로 잊혀진 존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들이 기억하고 알아주니 마음이 들떠 그랬을 것이다. 남들이 자신을 기억해 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그만한 일로 삶과 죽음을 연관시킬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평생을 의학자와 의사로 살아온 나. 하지만 강단을 떠나 가르침의 무대에서 내려온 지 어언 6년 9개월. 그러기에 교수로서의 내 이미지는 퇴색할 대로 퇴색하여 남들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있다는 소식에 다시 한번 과거의 영광과 열정이 되살아났다.


또한, 병원을 떠나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잊지 않고 찾는 환자들이 있다는 소식에 지난날 기억에 남을만한 대화를 나누었던 환자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 그러네.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로구나!"

그러면서 일어나는 생각 하나.

"인생이란 무대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비록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해도 다른 이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기억과 추억으로 남아있는 한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느냐는 것이다.


내 뒤에 남겨진 이들에게 추악한 모습, 원망 어린 모습, 한 맺힌 모습으로 남아있다면 저승뿐 아니라 이미 살다 간 이승에서도 지옥을 맛볼 것이지만 아름다운 모습, 그리운 모습, 고마운 모습으로 남는다면 저승뿐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이승에서도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