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의 회복
비인사
후두둑 후두둑
아침 일찍 튼튼 나무 위로
후두둑 후두둑
동글 열매가 깜짝 놀라
파르르 잠에서 깼어요.
짹짹 새가
비가 와요.
비가 와요.
반질 지붕 창문을 두드렸어요
도란 가족 아이가 부스스
눈 비비고 우와!
노란 비옷 노란 우산 노란 장화
노란 병아리로 변신!
튼튼 나무 아래 작은 물웅덩이
참방참방 신이 났어요.
까르르까르르
도란 가족 아이 소리에
멍멍 개도 폴짝폴짝
비 오는 날 아침
아주 신이 났어요.
위의 시는 제 글의 찐팬이자 동시 작가인 [봄비가을바람] 님이 자신의 브런치에 올린
『비 인사』란 동시입니다.
<튼튼 나무>, <동글 열매>, <반질 지붕>, <도란 가족>, <멍멍 개>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얼마나 깜찍하고 정겨운지요!
덕분에 요즈음 동시의 맛에 흠뻑 빠졌습니다.
동시를 읊다 보니 동요가 생각나고, 동요를 생각하니 그와 관련된 옛날 일이 떠오릅니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은하수 이야기
당시, 앞으로 내 인생에 적잖이 영향을 끼칠 커다란 우환이 집안을 덮쳤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1년 넘게 쫓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 판사로부터 시작해서 변호사, 검찰, 노동청 공무원, 은행 지점장, 악덕 형사,
빚쟁이, 브로커, 사기꾼, 사채업자, 거기다 조폭까지 -
내 나이 마흔 중반이 되도록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참으로 다양한 인종들을 만나
일주일에 세 번은 밥 사고, 술 사고, 부탁하고, 담판 짓고, 돈 주고, 돈 뜯기고,
뜯긴 돈 도로 찾아오고….
그동안 의대 교수로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이런 희한 빠꼼한 상황 앞에서
처음엔 무척이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웠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조건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먼저 고개 숙일 대상은 재단 이사장 정도였다.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할 일도, 잘 봐달라 사정할 일도, 손 내밀 일도 없는데
남에게 고개 숙일 일이 뭐 있겠는가?
비록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나한테 진료받으러 온다면 그가 먼저 고개 숙여야 한다.
그러던 내가 이제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 숙이고 부탁하고 사정하게 생겼으니,
그것도 내 잘못도 아닌 일로 그러고 다니려니 참말로 미치고 폴짝 뛸 노릇이라!
하지만, 그 덕분에 인생 공부 한번 찐하게 하고 산에서 도 닦는 것보다 더한 수양의 경지로 들어섰다.
그렇게 오만 꼬라지 다 봐가며 하나하나 다 해결하고 나자 남는 건 사람이었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알게 되어 친교를 맺게 된 사람들.
이젠 아무런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사람이 좋아 서너 명이 함께 만나기 시작했는데
각자가 친한 사람들을 한둘 씩 데려오다 보니 나중에는 근 10명 가까이 모이게 되었다.
- 또다시 판사로부터 시작해서 검찰, 경찰, 은행원, 공기업 사장, 사업가, 건설업자, 의사, 교수,
거기다 사채 업 하는 사람까지 -
이토록 직업군이 다양한 데다 나름대로 '내가 낸데'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행여 실수로라도 상대방의 자존심이나 자격지심을 건드리면 금방 금이 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한
그런 모임이었다.
그러기에, 누군가 무게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고 이들을 하나로 이어 줄 끈도 필요했다.
그때 내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동요!
네 번짼가 모일 때, 나는 기타와 함께 내가 만든 동요·가요 가사집 5권을 들고 가서
술이 한 순배 돌고 난 후 기타를 꺼내 들고 책을 나누어 주며 동요부터 부르자고 제안했다.
'아니, 이 나이에 웬 동요?' 하며 다들 뜨악한 표정으로 쭈뼛거리고 있었는데,
일단 내가 기타를 치며 선창을 하자 잘들 따라왔다.
동요를 부르는 순간,
다들 사회 계급장 때고 동심으로 돌아가 어린애의 마음이 되었기에 모두가 하나 될 수 있었다.
이런 일을 연이어 두 번 하고 나자 모임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참석자들로부터 생각지 못한 제안까지 나왔다.
이렇게 어쩌다 한 번씩 만나 술 한잔 하고 헤어질 게 아니라
아예 정식으로 동요 부르는 모임을 하나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것이다.
일사천리로 회가 결성되고, 초대회장으로는 제일 연장자이자 동요를 알게 해 준 내가 추대되었다.
회칙은 판사 중 한 사람이 만들기로 하고 나자 이제 회의 이름 정할 일만 남았다.
다들 동요 부르는 모임답게 동요 제목 하나를 친목회의 이름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추천을 받았는데, ‘은하수’와 ‘오빠생각’이 나왔다.
그런데 '오빠생각'을 추천한 사람이 하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그쪽으로 결정하기로 하는 순간,
판사 한 사람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회장님, 오빠생각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들 눈이 둥그레서 쳐다봤더니 그는 판사답게 다음과 같이 판결요지를 말했다.
“우리가 정식으로 회를 발족하면 회원 중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회의 이름으로 축하나 조의를 표하는 화환을 보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장례식장 입구에 애도의 화환들이 죽 늘어섰는데 화환 리본에 ‘오빠생각’이란 이름이 있으면 조문객들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어느 술집에서 보냈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은하수에는 회자를 붙여 ’은하수회‘라고 부르면 뭔가 그럴듯한데, 오빠생각에다 회를 붙여 '오빠생각회'라 하면 이름 자체가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은하수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이 말에 다들 배를 잡고 웃으며 “맞다, 맞다, 오빠생각은 안 되겠다. 마~ 은하수로 하자.”로 맞장구쳤고 그런 연유로 친목회의 이름은 '은하수회'가 되었다.
동시와 동요의 가치
그 은하수회는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고 그때 회장이 아직도 회장 노릇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동요라는 끈이 얼마나 끈끈하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지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육신(肉身)의 운명은 한 지점에서 출발해 평면 위를 달리면서 날이 갈수록 쇠(衰)하여져 종점에 가서는 멸(滅)하고 말지만, 우리의 영혼은 지구와 같이 둥근 구(球) 위를 달려 마지막엔 출발점에 다다라 본향(本鄕)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이때, 오래전 자신이 떠나온 집을 찾아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태어날 때 가졌던 그 맑고 순수한 영안(靈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눈을 되찾기 위해서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날이 새로워져서 그동안 세상살이에 찌든 마음의 때부터 깨끗이 씻어내야 하겠지요.
- 이기심과 탐욕,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 한(恨)과 저주 -
그 방법의 하나로 때때로 동시를 읊고 동요를 불러 봄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