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낙화
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이야기 열일곱
낙화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백과사전 한 권이 사라진다'라는 말이 있다. 노인의 지혜는 심심찮게 발생하는 산불 진화에도 크게 도움을 준다. 배가 산으로 가려할 때 막아주기도 한다.
백세 시대로 접어든 우리나라. 지혜는 늘어나는데 그 지혜를 차용해 쓰려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낭패를 본 후 후회하면 때는 늦다.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7, 8십에 해당하는 우리 집의 닭 한 마리가 노환으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목련꽃이 만개하고 자두나무꽃이 벙글던 그저께 일이었다. 한 열흘 전부터 시름시름 앓던 닭이 사과 박스 보금자리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횃대에 오를 힘을 이미 소진한 그녀는 평상시 알을 낳기 위해 드나들었던 보금자리에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으리라. 노인의 지혜는 여기서도 번득였다.
자두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꽃으로 환생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오늘 아침에 확인한 결과 또 한 마리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가장 생기발랄하고 영민하던 닭이다. 내가 모이 들고 집을 나서면 금세 알아채고 달려와 발에 감기곤 하던 붙임성도 좋은 녀석이었다. 외부 침입자로부터 공격을 받은 모양이다. 목덜미 부분을 공격한 후 그곳만 먹은 거로 봐서 적은 고양이쯤으로 짐작된다. 닭에게 적은 삵과 너구리, 오소리, 메와 고양이다. 이즈음엔 좀처럼 침입자가 없었는데 기어이 적한테 닭 한 마리를 내주었다.
이제 남은 닭 두 마리. 더 잃기 전에, 나물 씨 더 훔쳐 가기 전에 아내가 닭을 가두라고 닦달한다. 오늘 밤에는 그렇지 않아도 닭장에 가두어야겠다. 닭을 더는 키우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병아리 몇 마리 분양할 참이다. 아내 생각도 그렇고 손주들을 위해서도 병아리 몇 마리 데려와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마리는 너무 외롭다. 지금까지 닭을 몇 마리씩 분양한 적은 없다. 적어도 부화장에서 200마리씩 데려오곤 했다. 이젠 그만한 닭을 기를 여력은 없다. 나도 늙었나 보다.
대구 큰딸아이네가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낙동강 변 벚꽃놀이 갔다. 대구에는 벌써 졌다면서 같이 가자고 제안해 왔다. 나는 잠을 보충해야 한다는 핑계로 집에 머물렀다. 자주 그곳을 지나다닌 바 있고 조금 전 탁구를 끝내고 아내와 지나오면서 낙화하는 벚꽃을 감상하기도 했었다.
아내까지 합세하여 벚꽃놀이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내온다. 누가 지는 꽃도 아름답다, 했던가. 텔레그램으로 보는 낙화하는 벚꽃이 눈에 부셨다.
4월 초하루
벚꽃,
떨구는 살점 배기도 매혹적이다
저 꽃처럼
눈부신 날 있었던가?
--<벚꽃처럼>
"A 주점 사장님 남편분이 1년가량 안 보이시던데 어떻게 되셨나요, 돌아가셨나요?"
"네. 돌아가셨어요. 어저께가 그 형부 제사였어요. 그렇지 않아도 형부 이야기 나누며 울고 웃고 떠드느라 이렇게 늦었지 뭐예요.
새벽으로 가는 시각, 콜을 받고 A 주점에서 태운 두 분은 단골로 차를 부르는 손님이었다. 가까운 B 주점에서 먼저 내린 손님은 택시비로 5천 원을 먼저 지불했다. 그제야 내가 궁금했던 걸 남은 그 손님에게 질문했고, 손님은 내 궁금증을 한꺼번에 풀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보이지 않아 걱정했는데 역시 그렇게 되셨군요?"
"술 병이에요, 그 형부."
3, 4년간 내 차를 백 번도 넘게 이용하던 그 형님은 단골손님이었다. 이용 시간은 늘 새벽녘.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간이 망가져 온몸에 전이되어 죽을 날을 받아 놓았다며 푸념을 털어내곤 하시던 형님이었다.
"원도 한도 없이 살았니더. 낼모레가 여든이고 보니 이 세상에 미련도 없니더."
"그래도 약주를 좀 줄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형님."
"술을 줄인다고 더 오래 살 것도 아니고... 의사 선생이 죽는다고 했던 날보다 석 달을 더 살고 있다니까... 지금 삶은 덤인데 먹고 싶은 술이나 실컷 먹고 가야지... 먹다 죽은 자는 화색도 좋다고 하지 않았소?"
"......"
" 세 아이들 다 잘 커 줬고... 먼저 가서 마누라한테 조금 미안할 따름이지... 짐이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소?"
"웬, 그런 말씀을 다하세요?"
그날 유독 말씀을 많이 하신 것 같다. 내 차를 마지막 탄 날이 아니었나 싶다. 1년 전, 낙동강 변 벚꽃이 만개한 날이었으니까.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 술을 드셨어요. 언니가 그렇게 싫어했는데도 말이에요."
"맞아요. 그 형님, 하루도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잠깐씩 병원에 입원할 때 제외하곤 매일 새벽까지 술에 절어있던 형님이었다. 몇 번 아내가 경영하는 A 주점에 갔다가 문전박대당하는 걸 목격했던 터다. 술을 그만 먹으라고 목청을 돋우면 두말 않고 나와 다른 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곤 하던 그 형님은 이 세상에 없다. 떨어진 꽃잎 되어 스러졌지만, 지팡이 짚고 C 시장을 새벽녘까지 누비시던 환영은 동공에 어려 있다.
"오미크론이 득세하는 바람에 자정까지만 영업을 할 수 있지만 문 닫아걸고 이 새벽까지 할마시들이랑 회포를 풀었어요. 꽃놀이 한 번 제대로 다녀올 수 없는 이 세상이 벅차요.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 쳐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한탄스러워요. 그렇지만 우린 일어설 겁니다."
"암요. 세상은 멀지 않아 좋아질 겁니다. 우리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국민입니다."
"미운 이 세상을 안주 삼고 좋아하는 언니들과 형부를 추억하며 술 한잔하고 나니 기분이 많이 좋아졌어요. 우리 같이 파이팅해요."
"네. 떨어지는 꽃도 눈부시다고 했잖아요. 이 새벽을 밝히는 우리가 꽃입니다. 힘냅시다!"
그 손님은 겨우 기본요금 거리밖에 오지 않았는데 또 요금을 냈다. 사양했지만 기분이 좋아졌다며 기어이 요금을 놓고 내렸다. 떠나는 뒷모습도 아름답다.
벚꽃길을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핸들을 꺾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뒷모습처럼 지는 벚꽃도 오늘따라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