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거짓말하는 꽃
이야기 다섯
거짓말하는 꽃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운동 삼아 산에 밤 주우러 갈래요."
"아니. 야구도 봐야 하고 글도 써야 해."
아내의 제의를 거절하고 억이의 목줄을 풀어 나 대신 따라 보냈다. 내일 아침 9시에 마감해야 하는 글의 행방이 묘연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하루도 남기지 않은 시각까지 가닥을 못 잡은 때가 있었던가. '가을 수박'으로 가야 할지 코로나 2탄을 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야구는 5회가 끝날 때까지 팽팽한 줄다리기로 투수전이 이어지고 있다. 야구의 박진감에 빠져 닭을 굶길 수는 없기에 실내 옷차림으로 밖을 나섰다. 앞마당에 기대어 선 밤나무에선 파란 밤송이가 설익은 가을을 구가하지만 동산은 가을이 지고 있다. 마타리와 참취가 꽃을 보내고 결실의 계절을 부채질하고 있고. 하늘 나는 고추잠자리는 보이지 않고 큰 기름새가 동산을 점령한다. 해당화 열매도 싸늘한 기운에 주눅이 들고. 생뚱맞게 인동덩굴에서 노랑 흰 꽃이 피었다. 다 떠나는데 인동꽃만이 이 계절을 접지 못 하는 이유는 뭘까?
느림보 국화는 아직이고. 닭 모이를 들고 뒤꼍으로 돌아들자 뚱딴지꽃이 뚱하게 반긴다. 작년에도 뚱딴지같이 답하던 뚱딴지 노란색을 닮은 꽃은 올해도 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서양 민들레일 가능성이 74%란다. 속을 나도 아니다. 머쓱한 큰 키, 꽃잎 수가 아무래도 촘촘한 것, 긴 목을 가진 너는 민들레일 수가 없다. 네가 아무리 우긴다고 해도 내가 봄가을도 구분 못 할까? 콩을 팥이라 해서 믿을 이 몇이나 될까?
울퉁불퉁
못생겼다고 놀려도
녹색 이파리 뒤에 반쯤
얼굴 가리고 노랗게 웃는다
할아버지가
뚱딴지라고 부르시면
나는 나는
돼지감자라고 대답한다
오늘 밤 사쁜히
노랑나비 날개 접으면
쌔근쌔근
분홍 꿈 꾸며 함께 잘 테다
--<뚱딴지꽃>
닭 네 마리가 이틀 동안 이번에도 한 개의 알을 낳았다. 할머니 닭한테 더 많은 달걀을 기대하지는 않고 있지만. 한 마리 닭이 하루에 0.125개를 낳아도 불만은 없다. 귀촌 이후 나와 오래 교감을 나눈 가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만큼 정이 든 때문이기도 하다.
억이는 산 중턱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마당 주변에서 청명한 가을날을 만끽하고 있다. 야구를 이어 보기 위해서 방으로 돌아왔는데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추석 전 인근 마을에서 호출했던 손님이다. 터미널까지 간다고 했다. 부랴부랴 겉옷을 챙겨 입고 4km쯤 떨어진 산골 마을로 달려갔다. 일주일 전 그날은 가을걷이한 농산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보따리가 심상치 않다. 옷 보따리가 대부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명절 잘 쇠셨습니까?"
"보따리 싸서 갈려고요."
주섬주섬 뒤 좌석에 싣는 보따리는 작은 이삿짐 보따리가 틀림없다. 배웅하는 남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싸한 기운마저 감돈다.
"왜 그러세요? 보따리를 싸다니요?"
"그렇게 됐습니다."
지난번 명절, 아이들 맞이 경주 집에 다니러 가는 아주머니 손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럴 법도 한, 아주 특별한 사연은 아니었다. 10년 전 경주 지역에 함께 살 때 각기 홀몸이었던 두 남녀가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해 갔다. 직장에서 퇴직한 남자가 병약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주머니는 요양 보호사로 남자를 따라 이곳으로 오면서 자연스럽게 동거하기에 이르렀다. 평일 하루 세 시간씩의 요양 보호 외에도 집안일, 농사일에 겨운 데다 할머니는 시어머니 노릇까지 격하게 한다는 것. 처음에는 참고 견뎠지만, 강도가 심해지고 다툼이 잦다 보니 1년도 못 되어 파산 위기를 맞았다.
"어제 아저씨 딸이 와서 고구마를 캤는데 저는 들에 가지 않는다고 했어요."
"......"
"그 딸이 또 차를 가져갔어요. 급하게 병원에 갈 일도 있고, 기동력이 없으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닌데 말이에요. 그것까진 넘어갔는데 오늘 아침에 일이 터졌어요."
"시골에도 차가 없으면 많이 불편하죠?"
오늘 아침 식전에 할머니가 전동차를 타고 사라졌다. 함께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가 행방이 묘연하자 남자가, 보호사가 그것도 지키지 못하고 뭐 했냐며 나무라는 데서 사달이 났다. 엄밀히 따지면 휴일에는 보호의 의무도 없을뿐더러 평상시에도 며느리(?) 겸 요양 보호사인 아주머니 말을 귓등으로 듣고 오히려 구박만 해 오던 할머니였다. 위험하다고 산에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할머니는 추석에 연락도 없던 다른 자식 준다고 밤 주우러 갔다. 주워 놓은 밤도 보관도 어려운 지경인데. 셋은 각자 주장을 펼치며 아침 바람에 동네가 들썩일 정도로 다툼을 벌였다. 급기야 아주머니는 보따리를 쌌고 택시를 호출했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마음 좀 가라앉거든 돌아오세요."
"절대로 안 와요. 경주에 가면 일자리는 천지고, 하루 세 시간씩 일하면 휴일엔 쉬니까 내 시간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요. 책도 좀 읽을 생각이에요."
아주머니는 무거운 짐을 들고 지고 대합실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현명한 아주머니도 결국 숙제를 못 풀고 말았다. 내 집도 네 집도 이 숙제를 못 풀고 있는 명절 후 5일이 훌쩍 간다.
집으로 돌아오니 야구는 9회 말 투아웃 상태였다. 아직 0대 0.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이원석의 끝내기 안타로 응원하는 팀이 어제에 이어 1대 0으로 짜릿한 승리의 맛을 봤다.
아내는 그저께보다 절반의 밤을 주워 산에서 내려왔고 억이는 제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