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액자에 넣어 둔 가족사진이 몇 장 없다.
이사를 자주 다닌 탓인지, 원래 그런 걸 잘 챙기는 집이 아니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대신 앨범 속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몇 장 남아 있다. 배경이 흐릿하고 색이 조금 바랜 사진들. 어딘가 놀러 가서 찍은 것, 졸업식 날 급히 맞춘 것, 명절에 친척들 사이에 섞여 찍은 것. 그 사진들 속에서 우리는 거의 예외 없이 웃고 있다. 조금 어색하긴 해도 대체로 환한 얼굴이다. 나는 한동안 사진이란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웃기 위해 잠깐 멈추는 것. 그때만큼은 아무 일 없는 가족이 되는 것.
어릴 때는 사진 속 얼굴을 그대로 믿었다.
엄마가 웃고 있으면 즐거운 날인 줄 알았고, 아버지가 카메라를 보는 날이면 기분이 좋은 줄 알았다. 나와 동생이 나란히 서서 브이 자를 하고 있으면 그날도 분명 별일 없던 하루라고 생각했다. 사진은 그렇게 한순간을 고정해 놓는다. 그 안에 담긴 표정이 그날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 본 가족사진은 이상하게도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웃고 있는 얼굴보다 웃기 직전과 웃고 난 뒤의 공기가 먼저 상상되기 시작했다.
가장 자주 떠오르는 사진은 오래전 놀이공원에서 찍은 것이다.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동생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사진 속 엄마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아버지는 햇빛을 찌푸리며 카메라를 보고 있다. 동생은 솜사탕을 들고 있고, 나는 괜히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서 있다. 겉으로 보기엔 참 평범하고 화목한 사진이다. 그런데 나는 그날을 조금 안다. 출발하기 전부터 엄마와 아버지는 작은 말다툼을 했고, 차 안 공기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엄마는 괜찮은 척 창밖을 봤고, 아버지는 내내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놀이공원 입구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웃었다. 그 사진을 다시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저 웃음은 정말 즐거워서였을까, 아니면 잠깐만이라도 아이들 앞에서 좋은 하루처럼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가족사진은 이상하다.
남기기 위해 찍지만, 정작 남는 것은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누가 조금 더 지쳐 있었는지, 누가 애써 분위기를 붙들고 있었는지, 누가 자기 속마음을 뒤로 미뤘는지. 사진은 그것들을 찍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오히려 그런 것들만 또렷하게 비춘다. 젊었던 엄마의 눈가, 굳은 아버지의 어깨, 카메라를 보지 않고 다른 데를 보는 아이의 시선.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지나고 나서야 선명해진다.
한 번은 엄마와 함께 오래된 앨범을 넘긴 적이 있다.
사진 사이사이에 끼워 둔 영수증과 놀이공원 입장권, 바랜 메모들이 툭툭 떨어졌다. 엄마는 사진을 보다가 “이날 네가 감기에 걸려서 계속 칭얼거렸지” 하고 웃었고, 다른 사진을 보며 “이때는 아버지 회사 일이 좀 안 좋았어” 하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사진 속 아버지는 분명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웃는 얼굴 뒤에 그런 시간이 있었다니, 이상하게 마음이 저렸다. 웃는다는 것이 꼭 마음이 편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나는 그제야 조금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은 사진 찍는 순간만큼은 늘 비슷했다.
엄마는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고, 아버지는 빨리 찍고 가자고 했고, 나는 표정을 어색하게 굳혔고, 동생은 엉뚱한 데를 봤다. 그 짧은 소란 끝에 셔터가 눌리면, 우리는 마치 아주 잠깐 같은 마음이 된 사람들처럼 한 장면 안에 들어갔다. 사진은 그 찰나를 붙잡는다. 누군가는 서운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피곤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막 울음을 참았을지도 모르는데, 그 모든 마음 위에 웃는 얼굴 하나가 포개진다. 그래서 가족사진을 오래 보고 있으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웃고 있는 사람은 누구의 마음을 감추고 있었을까. 자기 것일까, 옆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그날의 하루 전체였을까.
나는 한동안 사진 속 웃음을 조금 불신했다.
너무 쉽게 화목해 보이는 풍경이 오히려 낯설었다. 가족이란 그렇게 단정한 것이 아닌데, 사진 속 우리는 너무 가지런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 웃음이 거짓이었다기보다, 어쩌면 그 또한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을지 모른다고. 완전히 평온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평온하고 싶어서 웃는 마음. 아이들 사진 속 하루를 조금 더 밝게 남겨주고 싶었던 마음. 잠깐만이라도 싸움과 피로와 걱정을 접어 두고 같은 프레임 안에 서 보려는 마음. 그건 위선이라기보다 애씀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유독 어색하게 웃는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 있고 눈은 대개 웃고 있지 않다. 예전에는 그 표정이 무뚝뚝해서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면, 아버지는 원래 사진보다 하루를 더 오래 견디는 쪽의 사람이었다. 웃는 표정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잠깐 마음을 고쳐 잡아야 했을 사람. 엄마는 반대로 늘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웃음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집 안의 분위기를 먼저 챙기던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집 안에서 울음보다 웃음을 먼저 꺼내야 했고, 엄마는 자주 그 몫을 맡았다.
사진 속 아이였던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순진하고 철없는 얼굴로 기억하지만, 어떤 사진들 속에서는 이상하게 조금 굳어 있다. 어른들 기분을 먼저 살피던 아이의 표정이 거기 있다. 동생은 더 어렸다. 그래서 더 천진해 보이지만, 가끔은 웃고 있으면서도 금방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린다. 아마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의 공기를 받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때는 몰랐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웃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 웃는 법을 생각보다 빨리 배운다는 것을.
지금도 명절이면 가끔 가족사진을 찍는다.
예전보다 웃는 법은 조금 자연스러워졌고, 사진을 찍고 나서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며 농담도 한다. 그런데 나는 셔터가 눌리는 그 짧은 순간마다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이 사진도 언젠가 다시 꺼내 보게 되겠지.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지금은 보지 못하는 것을 또 뒤늦게 보게 되겠지. 엄마 손등의 주름, 아버지의 굽은 어깨, 동생의 지친 눈빛,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웃어 보이려던 우리들의 마음을.
가족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완벽해서가 아닌 것 같다.
그 안에는 늘 조금씩 감춰진 것이 있다. 말다 못한 서운함, 다 풀지 못한 오해, 각자 품고 있던 걱정. 그런데도 한 프레임 안에 나란히 서서 웃으려 했다는 사실이 남는다. 어쩌면 가족은 그런 식으로 버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마음을 해결한 뒤에야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잠시 품은 채로도 같이 서 주는 것. 그게 아주 대단한 화해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작고 묵직한 신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이제 사진 속 웃음을 예전처럼 가볍게 보지 않는다.
그건 단지 잘 나온 표정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 마음을 잠깐 접어 넣고 만든 얼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날의 피곤을 감췄을 것이고, 누군가는 슬픔을 뒤로 미뤘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 하나쯤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족사진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한 사람만이 아니다. 그 안에 선 모두가 각자의 마음을 조금씩 감춘 채 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가족사진이 더 좋아졌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툴러서, 환해서가 아니라 그 뒤에 그림자가 있어서. 우리는 늘 다정하기만 한 가족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같은 날 같은 곳에 서서 함께 웃어 보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사진이 바래도 그 사실만은 남는다. 어떤 날의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 알지 못했어도, 그날의 프레임 안에서는 잠깐 같은 편이 되어 있었다는 것. 어쩌면 가족사진이 끝내 지키고 있는 것은 웃는 얼굴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서로의 곁에 남아 있으려 했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