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불행으로 날 위안삼지 않겠다

아픈 아이의 엄마가 될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by 한냥이

예전엔 나도 그랬다.

타인의 불행한 삶을 보며,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비교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나아가 자존감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는 결국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동정을 거부했다. 그에게 동정은 겉으로는 타인을 걱정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행위였다.


임신 20주 차, 정밀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정밀초음파 기계로 내 뱃속에 있는 태아의 장기와 신체 구조가 주수에 맞게 잘 발달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보통 20분 정도 걸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초음파 담당 선생님께서 40분 넘게 확인을 하며 계속 무언가의 길이를 재고 확인했다.

그것도 태아의 뇌 쪽을.


결국 초음파 담당 선생님은 나의 산부인과 주치의 불렀다. 주치의 선생님도 초음파 담당 선생님처럼 똑같이 재고 또 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진료실로 돌아왔다.

주치의는 말했다.

"태아의 뇌실 크기가 크네요. 특히 좌측 뇌실이 1.3cm에요. 우측 뇌실은 0.9cm에요."


뇌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병원에서는 0.9cm 이내일 경우 정상으로 본다고 했다. 그 이상일 경우엔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1.3cm는 꽤 큰 크기였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무서운 이야기들이 한가득이었다.


2주마다 병원에 가서 검사했지만 태아의 뇌실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의사는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수면마취를 하고 뇌 MRI를 포함한 각종 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로 나의 임신 기간은 지옥이었다.

희망과 설렘의 시기가 공포와 좌절의 시기가 되다.


'내 이가 아플 수도 있겠구나.'

'난 아픈 아이를 둔 엄마가 될 수 있겠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수없이 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태변을 먹었다.

아이가 울지 않는다.


소아과 의사가 들어왔다.

석션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울음을 토해냈다.


그렇지만 아이는 이미 태변을 먹었고,

숨을 쉬지 못 한 시간들이 있었다.


간호사들 아이를 바로 니큐로 데려갔다.

NICU. 이 역시 들어본 적 없던 단어였다.

신생아 중환자실이었다.


아이는 니큐에 11일 간 입원했다.

사실 나중에 세어보니 11일이었지, 병원에서 처음부터 입원일수를 알려주진 않는다. 언제 아이가 돌아올지 모르는 채로 하루하루 아이를 기다렸다. 미칠 것 같았다.


그 작은 아이가 니큐에서 힘든 치료를 받고 온갖 검사를 했다.

병원에서 내게 하루에 한 번 사진을 보내줬다.

코와 입에 호스를 꽂고 있는 모습이었다.

항생제 투여 때문인지 얼굴이 탱탱 부어있었다.


'저 아이가 내 아이구나.'


난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코로나 유행으로 산모도 아이 면회가 금지되어 있었다.


난 아픈 아이를 병원에 두고 퇴원했다.

대학병원에서 자연분만한 산모는 2박 3일 입원한다.

예약해 둔 조리원도 취소했다. 아이 없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 없이 남편과 둘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를 낳으러 갔던 때처럼.

돌아올 땐 셋일 줄 알았는데.


산후조리는 내게 의미가 없었다.

난 그저 침대에 누워서 아이 사진만 기다렸다.


유일하게 한 일이 있다.

모유를 유축해서 매일 저녁 니큐 앞으로 가져다주는 일.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모은 모유를 전달하기 위해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매일 같이 대학병원에 갔다.

고작 10미리였다. 50미리도 아니고. 난 잘 먹지도 못 했고 슬픔에 빠져있었다. 무기력했다. 10미리의 모유도 겨우 짜낸 것이었다.


그 모유가 담긴 팩을 들고 니큐 문 앞에서 간호사를 기다린다. 저 문 너머로 내 아이가 있겠지?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다. 내가 낳은 내 아이인데 만날 수가 없다.

간간히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 아이가 우는 건가? 보고 싶었다. 너무.


출산소식을 들은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의 연락이 왔다.

난 상황을 설명할 여력이 없었다.

축하 연락이 내게 축하가 되지 못했다.


아이가 입원한 지 십일쯤 되었을까.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뇌 MRI 검사를 할 때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고 내원하라고 했다.


그렇다. 난 이제 아이의 '보호자'였다.

무서웠다.

이 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지, 지킬 수 있을지.

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병원에 갔다.

아이를 처음 만났다.

인큐베이터 속 아이는 검사를 위해 8시간 금식을 해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2시간마다 우유를 먹는 신생아에게 8시간 금식은 고통이었다. 그 우는 아이의 입에 쪽쪽이가 물려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테이프로 고정한 모습이었다.


아이가 검사실로 들어갔다.

수면마취 주사가 들어갔는지 자지러지던 아이 울음소리가 서서히 줄어든다.

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었을까?

아픈 아이를 둔 엄마에게 주변의 시선은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내 첫째 아이의 이야기다.

다행히 그 아이는 지금 건강하다.


여담이지만, 둘째 아이도 뇌실 크기가 1.1cm로 컸다.

첫째 때와 같은 주치의는 "둘째도 큰 걸 보면 엄마 아빠 중 한 분이 뇌실 크기가 클 것 같네요."라고 했다. 둘째는 MRI 검사를 하지 않았다.


나의 임신과 출산은 힘든 기간이었다.

이때 다짐한 것이 있다.

다른 아픈 아이를 보며 내 아이가 건강한 것을 안도하지 않겠다고.

타인의 불행을 보며 같이 아파하겠다고 다짐했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아파할 용기를 기르고 싶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잠깐의 위안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지를 깨달았에.


아이가 니큐에서 퇴원한 후로도 정기적으로 추적검사를 받으러 대학병원 소아과에 갔다.


아픈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 아이들과 엄마를 위해 기도했다.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잘 헤쳐나갈 용기를 달라고.


그리고 소박한 돈이지만 기부를 시작했다.

백혈병과 소아암을 앓는 아이들에게.

내가 그들과 같이 아파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작가의 이전글'시절인연'에 연연하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