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유스 아이스하키 그 순수한 열정의 기록
이른 새벽,
밴쿠버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하키 가방을 끌고 가는 아이가 있다.
8살 손주 녀석의 아이스하키 경기를 보았다.
체격이 작은 축에 속하는 손주는
그 작은 몸으로 스틱을 움켜쥔다.
얼음판 위에서 퍽(Puck)을 쫓는 눈동자에는
투지와 치열함이 서려 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아이들의 거친 숨소리,
얼음 위를 할퀴는 스케이트 날의 금속음.
그 불협화음 속에서
열정적인 코치의 우렁찬 고함 소리마저
하나의 리듬처럼 들려온다.
경기가 끝나자 얼음 위의 긴장은 금세 풀리고,
아이들의 뺨은 차가운 공기와 달아오른 열기로 붉어진다.
두꺼운 장비 뒤에 숨겨졌던 천진난만한 표정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는
‘스포츠맨십’이라는 이름의 품격이 보인다.
이 할머니는
헬멧 안에서 정말 코치의 고함이 들리는지,
아이들이 실제로 그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지
괜히 노파심에 궁금해졌다.
경기를 마친 뒤 손주에게 물어보았다.
“경기 중에 코치 말 듣고 하는 거야? "
손주 녀석의 대답은 짧았다.
“Yes.”
당연한 걸 묻는 할머니가 오히려 더 신기하다는 듯
시크한 표정으로 말한다.
오늘은 토너먼트 경기였다고,
‘경기’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면서.
아이는 다섯 살 이전부터
얼음판 위에서 스틱을 잡았다.
그 시절,
무거운 장비를 갖추고 빙판 위로 걸어 들어가던
그 또래 아이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귀여움과 멋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에서는
언제나 걱정이 먼저 나왔다.
넘어지면 어떡하나.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이들은 넘어져도 잘 일어섰다.
노심초사하던 시간을 지나
어느덧 8살.
이제는 또래 메이저 팀에서
주말마다 토너먼트 경기를 치르고,
원정 게임까지 소화한다.
여느 스포츠 선수들처럼 결과에 일희일비하고,
팀원들과 “파이팅”을 외치며 서로의 등을 두드리는 법을
시간과 함께 배워 가고 있다.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의식이다.
빙판은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미끄럽지만,
가장 정직한 스승이다.
어린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미끄러운 링크 위에서
넘어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법을
몸으로, 마음으로 천천히 터득해 가는 모습은
삶을 배우는 하나의
거대한 성장의 의례처럼 보였다.
경기가 끝난 뒤 텅 빈 경기장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링크 위에 남은 무수한 흉터 같은 스케이트 자국들.
그것은 아이들이 오늘 하루를 얼마나 뜨겁게 살아냈는지를
말없이 증명하는 훈장 같았다.
링크와 관람석을 바라보다
문득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1970년대 영화
〈러브 스토리〉 속
부자간의 하키 경기장 장면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묵직한 부성애가 흐르던 장면.
아들의 경기를 보러 왔지만
아들 앞에 나서지 않고
관중석 멀찍이 앉아 지켜보는 아버지.
아버지가 온 걸 알면서도
모른 척 경기에 몰두하는 아들.
아버지는 아들이 이겼는지 졌는지보다
빙판 위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달렸는지를 본다.
살가운 대화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투지를 인정했고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인정받고 싶은 아들과
서툰 방식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
한때 내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 두었던 명대사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
나 또한
인생이라는 미끄러운 링크 위에서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어떻게 다시 일어났는지를
지나온 시간 앞에 조용히 떠올리며
경기장을 나왔다.
넘어지는 일보다 다시 일어나는 방식이
삶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