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것과 지켜주어야 할 것 사이에서
오늘 아침, 우연히 한 영상을 보았다.
몸 한쪽이 불편해 잠결마다 침대에서 떨어지는 환자,
그 곁을 뜬눈으로 지키는 보호자.
병원은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해 그를 묶어둘 수밖에 없다고 했고,
보호자는 그 말 앞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묶지 않아도 되는 병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내려앉았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손길이
어쩔 수 없이 다른 무언가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 모순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문득,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해하지 못한 채 가슴에만 품어두었던 책이었다.
비에리는 말한다.
“존엄은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 속에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도 쉽게 길을 찾지 못했다.
존엄, 품위, 삶의 격—
그 단어들은 맑지만 깊은 물 같아서 들여다볼수록
내 얼굴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내가 어떤 존재로 살고 싶으며 어떤 방식으로
나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물음 앞에서 오래 머뭇거렸다.
그런데 오늘 영상은 그 모든 개념을 갑자기 눈앞의 현실로 끌어왔다.
내 존엄이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마주하자
비에리의 문장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순간,
인간의 존엄은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타인이 나를 어떻게 맞이하는가’라는 문제로 건너간다.
누군가의 손길이 나의 목소리가 되고,
누군가의 태도가 나의 이름이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묶는다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 안에 담긴 마음, 언어, 시선이 문제라고.
효율과 관리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행동은
한 사람을 ‘관리해야 할 위험’으로 만들지만,
두려움과 수치심을 헤아리며 건네는 설명은
그를 다시 ‘나’라는 존재로 되돌려준다.
같은 손길이라도
어떤 태도로 뻗어 나가느냐에 따라
존엄은 무너지고, 존엄은 지켜진다.
“많이 다치실까 걱정되어
가능한 한 덜 불편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은
묶는다는 행위를 폭력이 아닌 대화로 바꾸어 놓는다.
존엄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완전히 지켜지느냐, 완전히 잃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보호자처럼 묶지 않는 병원을 찾아
밤새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음—
그 마음이 곧 존엄을 향한 노력이다.
존엄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시도,
그 끝없는 방향성 속에서 살아난다.
나는 오늘의 장면 앞에서
비로소 이 단어를 조금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떨어지는 몸을 막기 위해 누군가를 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사람은 지금 어떤 감정 속에 있을까?”
“덜 모욕적인 길은 없을까?”
“이 사람은 여전히 ‘나’라고 불릴 수 있을까?”
존엄은 이 질문들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깃든다.
오늘 아침, 영상 하나가
《삶의 격》의 문장을 다시 불러내었다.
슬픔처럼 찾아왔지만, 감사처럼 남았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나는 나의 존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엄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바라보았다.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조용한 마음의 방향을 잃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조용한 태도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