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 재정렬하기
시중에서 세계사를 다룬 교양도서는 넘친다.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인류의 문명부터 현대세계까지 통사(chronology) 형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차이점은 무엇일까? 내용의 깊이와 관점의 차이다. 여기 기존 도서와는 조금 다른 시선을 가진 책을 한 권 소개할까 한다. 『옥스퍼드 세계사』. 제목에서부터 오는 명문 대학의 압박은 왠지 모르게 신뢰감을 준다. 제목이 주는 믿음직함이 이런 것일까 싶다. 실제로 책은 역사책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기 구분 방법을 적용하고 있으며, 익숙한 용어와 지명 그리고 인물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저자들 역시 앞서 나왔던 과학자가 아니라 모두 역사학을 전공하고 연구한 역사학자들이다. 그래서일까 분량은 기존 세계사 도서보다는 두꺼웠지만, 부담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서문에 나와 있듯이, 책은 아주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기획되었다. 인류 전체 역사를 조망하되,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검토하여 최대한 많은 다양성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저작이라는 안내가 서문에 나와 있다. 이를 위해 11명의 저자는 발산과 수렴, 성장, 3가지 대혁명, 문화의 제약, 주도권의 이동 이렇게 크게 5가지 기조에 초점을 맞췄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책의 목차도 기존 역사서와는 조금 다르다. 많은 역사책이 초기 인류의 역사 부분에서 자연환경을 단지 배경으로만 설명하고 넘어가고 있음에 반해 책은 과감히 모든 5개 부 시작의 한 장을 모두 자연환경과 인류의 관계 설명에 할애했다. 나머지 장도 인간의 정신문화와 관련된 부분을 먼저 서술하고 정치와 사회변화를 맨 마지막에 서술했다.
그렇기에 책은 환경사(인간과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에 관한 지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각 장마다 전염병으로 인한 역사 흐름의 변화는 매번 등장한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시대의 흑사병, 신항로 개척 시기 천연두 설명뿐만 아니라 괴혈병, 말라리아, 매독, 스페인 독감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외에도 화산폭발 및 태양의 흑점 변화에 의한 기온 하락 등 여러 자연재해 및 인간의 자연환경 개척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전달해준다. 이런 측면에서 『옥스퍼드 세계사』의 환경사 서술은 인간 중심의 사고에 전환을 요구한다.
특히 1부와 2부 부분이 환경과 인간의 상호 작용 부분이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두 부분은 구석기, 신석기 그리고 청동기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잠시 훑고 지나가 버리거나 잠깐 언급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책은 이 부분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공통 특징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일례로 유라시아 지역의 문명 발전을 환경과 연결지은 부분은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총, 균, 쇠』를 좀 더 쉽게 설명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점 외에도 책은 근래 들어 역사학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지구사적(global history) 접근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하나의 개념이나 현상을 설명하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예시를 제시하면서 유럽에 편중하지 않고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역사를 고루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 세계의 역사가 내재적 요인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외부 요인의 중요성을 주창한다. 특히 10장의 저자는 이런 역사적 흐름을 한층 더 강조한다.
글쓴이가 찾아 헤매던 인류세 이야기는 11장 근대 부분에서 등장한다. 이 부분은 무려 거대사(big history) 사가(史家)로 유명한 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이 담당했다. 그는 현대 세계의 주요 환경문제인 인류세의 시작점과 진행 과정을 하나의 장으로 짧게 요약해서 글쓴이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11장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지금의 환경위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요약본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생각은 여타 과학자들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크리스천은 인류세의 시작점을 산업혁명으로 정하고 있으며, 이는 유명 환경사학자인 존 맥닐(John McNeill)의 견해와 궤를 같이한다. 특히 이 장의 백미는 543쪽에 있다. '스페인 독감을 설명한 부분에서 필자는 코로나의 위험성과 영향이 이미 예견되었다'는 크리스천의 설명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계사라는 익숙한 서사에서 오는 새로움. 13개의 장, 630쪽을 넘어 에필로그에 도달하면서 글쓴이의 머릿속에 남는 감회였다. 『옥스퍼드』는 역사학이 자연과학의 융합을 시도했다는 관점에서 하나의 혼합적인 서술방식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계점도 여전히 존재한다. 환경사를 적극적으로 포용했지만, 각 부의 첫 번째 장을 제외하고는 환경과 관련된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점은 다이아몬드가 책 추천사에서 언급했듯이, 책은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장점 앞에 보이지 않는 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옥스퍼드』는 이런 도서를 읽는 우리에게 임무를 명확히 제시해준다. 앞으로 기후위기라는 큰 공포 아래 미래를 어떻게 대비할지는 다시 한번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가 아마 책이 인문학의 위기 시대에 던져주는 가장 묵직한 전언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