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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괴괴랄랄 Apr 20. 2023

내가 쥐가 되어볼게- 얍!

랫's Diary


  나는 흰 실험대 위에 있었다.

내 양쪽 위아래에 모두 나와 똑같은 것들이 누워있었고 살려달라는 나와 그들의 외침이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랫'이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나에게 단 한 줄의 설명 없이 내 몸에 주사기들이 꽂혔다.

주사기 바늘을 타고 내 몸에 무언가 흘러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고통에 나는 소리를 질렀고 바닥을 굴렀다.

나를 내려다보는 흰 마스크와 흰 가운으로 무장한 사람이 파일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이제 끝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두 번째 주사기가 내 몸에 꽂혔고,

 아까보다 더한 고통이 나를 비명 지르게 만들었다.

 도와달라고 고통스럽다는 소리 역시 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들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두려웠던 건 나의 비명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비명과 고통에 조금의 공감도 하지 않는 얼굴로 나를 무신경하게 바라보는 그 눈이었다.

더 이상의 생각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주사기는 점점 더 나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고 나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정신을 잃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옆에는 어제와 다른 나랑 똑같은 것들이 있었다.

 사실은 우리 모두 달랐다. 우리는 그들에게 ‘랫’이기 이전에 다른 곳에서 태어났고 다른 삶을 살았으며 우리가 사라졌을 때 고통스러워할 다른 가족이 있었다. 그곳에서 내 존재의 기억과 의미는 없었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랫’이었다.


이런 하루가 반복되었다.

바로 옆에서 자신의 머리가 아닌 다른 것의 머리를 이식하고 고통에 뒹굴다가

결국 숨을 거두는 장면을 보았다.

마스카라를 수천번씩 바르고 눈이 먼 상태로 결국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도 보았다.

털을 다 깎고 가장 연약한 살에 화학약품 수백 개를 발라야만 하지만

결코 죽음에는 이르지 않아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보았다.

자식과 일부러 떨어뜨려서 그 자식들이 얼마나 우는지, 아이가 우는 것은 그냥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외로움이나 슬픔에 의한 것 인지에 대해 실험을 하는 것도 보았다.

오늘도 실험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는 그 사실보다 난 오늘도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하게 되었다. 내 옆에 있던 자들이 고통에 지쳐서 하나둘 씩 자취를 감출 때도

나는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나는 점점 익숙해졌다.

오히려 우리를 통한 실험은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고 삶을 이로운 방향으로 발전토록 하는 기반이다.

나는 그들이 수없이 작성하고 추가하며 생명윤리라는 이름 하에 내놓은 준법서약과 3R원칙이 쓰여있는 실험실에 들어가 보고 난 후에야 이곳의 부정함과 부당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당하고 있는 부당함을 호소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나를 강제로 억압하고 가두고 있는 불의의 어두운 집단이 아니라 나 하나쯤 실험 도구로 사용하여 세상을 발전시키는 연구원 집단이란 걸 알았다.      


3R원칙

Replacement(대체); 동물 실험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색

Reduction(감소);보다 적은 수의 동물을 사용하여 필적할 만한 정보를 얻거나, 동일한 동물수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방법을 모색

Refinement (개선) : 동물에게 가해지는 비인도적 처치(inhumane procedures)의 발생을 감소시켜 주는 것. , 통증과 스트레스를 경감시키고 실험동물의 행복을 향상해 주는 방법을 모색

우리는 이 원칙 하에 실험실에 존재한다. 따라서 누구의 기준인지 모를 인도적 처치를 받으면서 실험실 내에서 최소한의 고통과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받는다. 이 모든 기준이 우리가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정당화한다. 사람들은 억지로 눈을 질끈 감는 척하면서 우리의 고통보다 인간들이 얻는 이익이 크다면 실험을 강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나를 대체할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고 실험에 동원할 동물의 수를 최소화 한 와중에 한 마리일 뿐이며 행복을 최대한 향상한 실험실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나를 제외한 인류와 이 세계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나는 인류와 이 세계의 발전에는 관심 없고 그냥 당장 내일 내가 숨 쉬길 기도하며 잠에 든다.


 만약 내가 실험실에서 강제로 실험의 대상자가 되어 억지로 화학약품을 주입받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꺼내줄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두려울까? 내가 도망쳐서 그들이 나에게 부당하게 실험을 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그게 나쁜 짓이라고 안 해준다면 그런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저는 선하고 착한 감정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괜찮고 발전되고 평화로운 곳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 사회가 '윤리'를 정해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낙태는 살인으로 취급되어 왔지만 지금은 산모의 건강과 자기 결정권 문제

 대두되어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윤리의식이 확립되고 있는 것처럼요.

이런 식으로 윤리의식은 언제 어떻게 사회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둘지 모르는 일입니다.

만약 지금 살인이나 생체실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윤리의식이 훗날의 사회가 만든 가치와 상충한다면 우리는 살인, 강제적 생체실험 모든 것이 윤리로써 허용되는 곳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실험실의 수많은 동물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어왔습니다.

고대 희랍에서부터 19~20세기 산업혁명의 주요 사상까지 인간을 자연을 도구로 사용할 주체라는 입장은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습니다. 고대 희랍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만물의 척도는 자신=인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면서 나온 주장이지만 만물을 판단하고 구별할 수 있는 주체는 인간임을 확실시하면서 인간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과 달리 동물에게는 정신이나 영혼이 부재하기 때문에 쾌락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동물들이 인간이 받을 고통을 대신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자연을 도구로 하여 성행하였고 그러한 성행 속에서 인간은 더더욱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습니다. 따라서 이전의 생명윤리는 단 한 번도 인간 외의 생명에 대해서 다루지 않았습니다.


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누구도 어떤 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더 넓은 시야로 다양한 생명에게 공감할 수 있다면 인간의 의식은 한층 더 발전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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