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건축을 하다

Anton Bruckner

by 이기적인 도깨비

르 코르뷔지에, 이오밍 페이, 페터 춤토어, 루이스 칸, 안도 다다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이들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지도 모를 세계적인 건축가들이다.


최근 한국의 건축가 유현준 님의 책들을 꽤 솔솔 하게 읽었는데, 1996년 스위스에 지어진 '발스 스파'편에서 완성도 높은 건축을 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1)

페터 춤토어는 스위스 건축가로, 완성도 높은 건축을 한다. 여기서 완성도란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하나는 재료의 물성을 잘 이용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공의 정밀도다 - p.170


건축물은 한 나라의 문화 결정체이자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작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축 공간 자체는 회화나 음악과는 다르게 시간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통의 매개체가 되어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인 관점에서 '회화나 음악은 건축 공간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나 음악 역시 오랫동안 인류의 공감과 정서를 이어오는 또 다른 소통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특히 음악을 건축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다 - 괴테


건축과 음악은 비록 학술적으로 유사한 공통점을 갖고 출발하지만 정과 구성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건축의 뜻 자체가 '세우고, 쌓는다'라는 의미만 놓고 보면 둘 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건축을 하기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실제로 음악을 시각적 형태로 건축한 작가도 있다.


건축가에서 회화 작가로 거듭난 강상훈 님으로, 그는 기계공학을 전공하였지만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괴테의 저 문장을 통해 회화의 세계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강상훈 ‘Bolero’ by M. Ravel-Series IV 20243

그렇다면 건축을 통해 음악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과 달리, 음악으로 건축을 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재료의 물성은 당연히 음표를 기본으로 한 화성과 선율일 것이고, 시공의 정밀도는 화성을 음악적 지시와 기호에 따라 촘촘하고 단단하게 구성하여 점차 쌓아 올려 진행시키는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음표들로 이어진 선율을 제외한 악보의 여백은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3차원의 빈 공간기에, 그 공간에서 얼마든지 소리의 울림을 통해 입체적인 형성을 시도할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는 바로 안톤 브루크너 Anton Bruckner 다. 2)

Anton Bruckner 1824-1896

브루크너가 다른 작곡가와는 다르게 건축적인 음향을 추구하고자 했던 배경에는 그가 당시 손꼽히는 오르가니스트였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파이프 오르간은 기술적인 설명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이미 시각적으로 거대한 울림과 성량을 느끼게 한다.

주석과 납으로 만들어진 파이프는 크고 길수록 통과하는 바람의 컨트롤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데, 결국 건축물 규모에 따라 비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르간 자체의 형태만으로도 벌써 크고 웅장한 건축물에 어울리는 울림을 가능하게 하고, 파이프의 구조적이면서 기능적인 특색에서 조차 건축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그렇게 보자면, 오르간이야 말로 음악과 건축의 가장 이상적인 콜라보일지도 모른다.

독일 파사우의 성 스테판 성당 내 초대형 파이프 오르간. 성당의 규모가 클수록 파이프 오르간의 규모도 비례한다

그의 아버지도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DNA 자체만으로도 부정할 순 없지만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한다거나, 성가대 합창단원으로도 활동. 그리고 다른 저명한 오르가니스트에게 통주저음(다른 선율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저음-글쓴이)을 비롯한 대위법 같은 전통 음악이론을 지겹도록 반복 학습한 결과, 단선율의 작품보다 입체적인 관현악곡에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졌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린쯔에 위치한 성 플로리안의 브루크너 오르간. 아래에는 브루크너의 관이 있다

브루크너 교향곡은 교향곡 5번, 8번에 이르러 음향 건축이 여러 번 시도된다. 그러다 곡의 근간을 이루는 화성적 요소들이 9번에 이르자 거대함과 치밀함의 끝을 보여다. 3)

건축으로 치자면, 초기엔 목재로만 건물을 짓다가 이후 철근 콘크리트를 이용해서 더욱 단단히 쌓아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반듯하고 촘촘한 거푸집에 한 치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고 들이붓고, 비바람에 일체의 간섭이 없는 양생을 거친 후 이러한 과정을 반복적으로 묵묵히 진행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과정에 필요한 설계도면은 음악에서는 악보가 대신한다.


브루크너 교향곡 9번 Adagio 악장에는 음향 건축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건축형식이 도드러지는 부분은 리허설 기호 G, 즉 109 마디에서 처음 시도된다. (브루크너는 모든 자필 악보에 알파벳으로 리허설 리호 Rehersal Letter를 표시하였다-글쓴이)

동그라미의 첫 음을 반음씩 상승하면서 다른 선율도 상승 동형진행을 한다

그리고 리허설 기호 K에서 좀 더 세밀하게 등장하는데 반음계로 화성을 점진적으로 쌓아 올리면서(피아노를 예로 들면 흰색, 검은색 건반하나하나를 높은 소리 쪽으로 차례로 짚는 것과 같다-글쓴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선 현악기나 타악기가 강하게 울려 퍼진다.

마치 성당처럼 성스러운 건물을 단단히 쌓아 올리다 첨탑에 이르러 십자가나 성인聖人형상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이러한 시도는 마지막 리허설 기호 O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룬다.


아래의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면 위의 목관 악기군부터 금관 악기군, 현악기군이 차례로 음정 혹은 선율이 점차 반음 또는 한음씩 상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선율의 상승은 무려 20마디 이상 지속된다.

위, 아래 모두 브루크너 교향곡 9번 학습용 총보(빈음악 출판사, 2005)

하지만, 솔직히 시각적으로 그 느낌을 체감하기란 어렵기에 아래의 교향곡 9번 Adagio 중 마디 186부터 시작되는 1분 정도의 연주를 통해 감상해 보길 권한다.

Paavo Järvi(지휘), Tonhalle Orchestra Zurich (출처: DW Classical Music YouTube)

브루크너가 실제 건축가였다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재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교회나 성당을 짓는, 건축 거장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1) 유현준의 인문건축기행(유현준, 을유문화사, 2023)

2) 2024년은 안톤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이었다

3) 홍정진, '안톤 브루크너의 중기 및 후기 교 향곡에 나타난 정점 형성의 미학과 작곡기법적 특성', 논문 중 8번 교향곡을 건축에서 쓰는 '전사작업'을 통해 분석 시도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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