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는 황금색만 쓰는 줄 아셨죠?

메트로폴리탄, 클림트의 마다 프리마베시

by SUN 작가


마다 프리마베시 Mäda Primavesi (1903–2000)

구스타브 클림트 Gustav Klimt

1912 - 1913

Oil on canvas

149.9 x 110.5 cm


비엔나의 공방인 Wiener Werkstätte 의 후원자로서 클림트를 열렬히 후원했던 은행가 아빠 오토 프리마베시 Otto Primavesi 와 엄마 유제니아 프리마베시의 딸인 마다 프리마베시의 9살 생일을 맞아 의뢰한 작품으로 마다의 가족이 소유한다. 1926년 남편의 사망 이후 부인인 유제니아가 가지고 있다가 1928년 프리마메시 가문의 사업인 은행업과 섬유업이 파산 위기에 처하면서 자금 마련을 위해 이 그림을 비엔나의 인류학자이자 수집가인 휴고 베르나츠크에 판매한 후 오토 칼리르 갤러리(이후 이름이 노이에 갤러리로 바뀜. 지금의 뉴욕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가 아니고 그 당시 비엔나에 있었음)가 다시 구매한다. 이후 1930년부터 1938년까지 우리가 잘 아는 퓰리처상 이름의 언론 재벌인 조지프 퓰리처 가문의 제니 퓰리처 슈타이너가 구매한다. 1938년 3월 그녀는 나치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이 일어나면서 유대인으로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오스트리아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뉴욕으로 망명한다. 그 사이 이 작품을 포함한 그녀의 소장품들은 나치의 유대인 재산 몰수법에 따라 같은해 10월 재고 목록에 ‘Mädchenbild 소녀의 그림’ 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압류당한다. 나치는 몰수한 작품들을 현금화 하기 위해 강제 경매에 부치고 이 작품은 그 당시에도 너무나 터무니없는 2,200 라이히스마르크(약 $880) 에 비엔나 시립 미술관에 팔린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제니 퓰리처 슈타이너는 소송을 통해 나치에게 강제로 뺐겼던 이 작품을 1951년에 돌려 받고,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가져간다. 1958년 제니의 딸인 클라라와 사위인 앙드레가 상속받아 소유하다가 1964년 어머니인 제니 퓰리처 슈타이너를 기리기 위해 가족들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한다.

9살 당시의 마다 프리마베시 사진과 부모인 오토와 유제니아 프라마메시 Mäda Primavesi, 1912, Otto and Eugenia Primavesi From klimt-database.com


나치시대에 이와 같이 강제 몰수 당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비슷한 사례를 영화로 만든 것이 ‘우먼 인 골드 Woman in Gold’ 이다. 이 영화의 실제 작품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로 나치에게 몰수당한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마다 프라미베시 작품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약탈을 인정하고 비교적 순탄한 과정으로 1951년에 제니 슈타이너에게 돌려 주었는데 반해 아델레의 초상화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아델레의 유연에 따라 기증된 거라고 주장하면서 반환을 거부해 8년간의 긴 소송 끝에 2006년에 반환받게 된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 에 있으니 클림트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함께 방문해 보시길 권해 드린다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 있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neuegalerie.org


클림트의 마다 프레마메시 Mäda Primavesi, Gustav Klimt, 1912 - 1913, The Met, 뉴욕


새롭다. 클림트의 황금색 그림만 보다가 이렇게 원색 칼라의 그림을 보니 나도 덩달아 아이가 된 것만 같다. 어린 아이의 낙서같은 그림이다. 클림트가 금박과 은박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던 시기가 1901-1910년으로 이 시기를 보통 클림트의 황금 시대라고 부른다. 그 이후 클림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꽃무늬와 색채, 꽃패턴으로 그림을 그리는 꽃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 그림이 그 시기의 그림이다. 배경을 위 아래로 2분할로 나눈 것도 신선하고, 아래는 땅에 새들이며 꽃들이 뒤 엉켜 있고 위에는 보라색 하늘에 꽃들이 흩날린다. 이처럼 화면을 심플하고 과감하게 위아래로 나누고 화려한 배경의 동양적 꽃들과 색감이 그 당시 유행하던 일본 미술인 자포이즘의 영향이라고 하니, 에잇. 뒷배경의 꽃들과 아이의 옷이 하나의 평면처럼 그려져 있다. 사람과 배경 구분없이 꽃들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내가 배경이요, 배경이 곧 나다. 가만히 보니 소녀는 두 다리를 벌리고 당당히 우뚝 서 있다. 한 손을 허리춤에 대고 표정은 뭐 하나 꿀릴게 없다는 얼굴이다. 수줍고 귀여운 소녀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고 조금은 당돌해 보이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다. 실제 마다의 성격이 이렇게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자신의 의견과 요구를 주저없이 잘 말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클림트는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당당한 아이의 모습으로 그렸다.


“ 클림트 아저씨는 내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을 힘들어할 때마다 사탕을 주며 달랬어요” 라며 훗날 마다는 회상한다. 그림 속의 표정은 오랜 시간 포즈를 취하며 지친 소녀의 실제 감정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소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클림트가 꽃 장식과 흰색 실크 드레스를 선택하고 그의 연인이자 뮤즈인 오튀르 패션 디자이너 에밀리 플뢰게가 헐렁하고 활동적인 스타일로 디자인하고 빈 공방에서 제작을 맡아 진행하였다고 한다. 참 이쁘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미쳤다. 화려한 색상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이다. 미술관에서 꼭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한 번 보시기 바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또 다른 클림트의 세레나 퓰리처 레더러 Serena Pulitzer Ledereri, Gustav Klimt, 1899, The Met,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마다 프리마베시 작품 옆에 걸려 있는 또 다른 클림트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마다의 화려한 색감과는 정 반대로 참 수수하고 따뜻해서 좋다. 튀지 않은 백색과 아이보리, 연한 브라운이 모두 같은 색덩어리로 표현된 느낌이다. 순둥 순둥하다. 어찌보면 하얀 고스트 느낌이기도 하다. 클림트의 황금 시대로 들어가기 전 그림으로 절제의 미가 있다. 과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이런 걸까? 그렇지만 얼굴 표정은 살아있다. 환하게 웃고 있다. 부족할 것 없이 좋은것만 보고 입고 자란 동네의 마음씨 좋은 부잣집 귀부인 같다. 1901년 제 10회 비엔타 분리 전시회에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똑바른 꽃, 긴 줄기, 검은 튤립’ 이라고 하며 이미 비엔타 사회의 스타였던 그녀의 그림에 열광했다. 이 그림 속 인물인 세레나 퓰리처 레더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퓰리처 가문의 유명한 언론인인 조지프 퓰리처의 조카이며 마다 프리마메시 작품의 소유주였던 제니 풀리처 슈타이너의 친언니이다. 남편인 사업가 아우구스트 레더너는 그 당시 비엔나에서 로스차일드 가문 다음으로 돈이 많았던 레더너 가문을 이끌었던 인물로 돈이 그냥 어머어마하게 많은 가문이었다. 그 당시 클림트의 작품을 소유한 개인 중 가장 많은 약 50점 이상을 보유하였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게 거의 몰수당하고 불타서 많은 작품들을 잃게 된다. 세레나는 2차 세계대전 종료 전인 194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생을 마감한다. 웃고 있는 모습과 다르게 힘든 삶을 살다간 여인이었구나. 다시 그림을 봐도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다.

1940년경 나치기간 동안 위 그림 속 모델인 세레나 레더러는 유대인 딸인 엘리제베스 레더러를 살리기 위해 ‘내 딸인 엘리자베스 레더러는 내 남편 아우구스트의 자식이 아니라, 화가인 클림트와 바람 핀 관계로 낳은 사생아입니다’ 라고 공식 진술서를 제출한다. 어머니가 딸을 구하기 위해 불륜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엄마란 이런 존재구나. 자신을 버리고 딸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까지 하는구나. 이 당시 부모 중 한 사람만 유대인이 아니어도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클림트가 그린 엘리자베스 그림과 스케치들이 정황적 증거로 작용 한다. 1943년 나치는 어머니인 세레나의 의견을 받아 들여 엘리자베스에게 ‘혈통 증명서’를 발급하고 그녀를 학살자 명단에서 제외한다. 또한 나중에 이 증명서는 엘리자베스에게 클림트의 작품을 상속받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쯤되면 엘리자베스는 클림트의 진짜 딸 아냐? 모르겠다. 클림트가 그렸다는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 은 1944년 엘리자베스가 사망하고 1948년에 그녀의 오빠인 에리히 레더러에게 반환되었다. 그 후 오빠가 줄 곧 소유하고 있다가 1983년에 에스티 로더의 후계자인 레너드 로더가 이 작품을 구매한 후 소장하다가 2025년 11월 18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와 2억 3,640만 달러(약 3,460억원)에 낙찰받아 뉴스에게 크게 난 바로 그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4억 5,030만 달러에 이은 역사상 전 세계 두번째로 비싸게 팔린 작품, 현대 미술 역대 1위, 소더비 역대 1위 등 많은 수식어가 붙은 값비싼 그 그림이다. 강렬한 색채, 중국 문양과 인물등 동양적인 패턴에 심취해 있던 클림트 후기 그림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딱! 클림트 작품이다.

클림트의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 Portrait of Elizabeth Lederer, Gustav Klimt, 1914-1916, Private Collection


구스타브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황금색 욕망의 화가’로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의 수식어처럼 화려한 황금색의 작품들을 많이 선보이며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다.


아직 ‘키스’ 작품을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비엔나에 온 것이 아니다

If you haven't seen 'The Kiss', you haven't been to Vienna.

클림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키스 The Kiss’를 보기 위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전 Belvedere Palace 을 찾고 있다. 클림트는 왜 이렇게 황금색 그림을 많이 그렸을까? 186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구스타브 클림트는 금 세공사였던 아버지와 비엔나 응용 예술 대학(Vienna Kunstgewerbeschule)에서 공부한 영향으로 금을 작품에 활용한 다양한 기법들을 익히게 된다. 태생이 금인 집안이었던 것이다. 초창기에는 벽화와 천장 작업들을 많이 하였는데, 이는 후에 작품 속의 패턴과 이미지들이 벽화에서 보여지는 특징들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 당시에도 너무나 파격적인 선정성과 메시지 때문에 보수적인 분위기였던 오스트리아 미술 시장과 협회에서 그를 잘 받아들이지 않자, 클림트는 이에 반발해 기존 미술과 분리한다는 의미로, 1897년 빈 분리파(Vienna Secession)를 결성하고 자신이 직접 초대 회장이 된다. 그는 이후 기존의 순수미술에 여러 응용 미술이 접목된 새로운 예술 New Art 을 보인다는 의미의 아르 누보 Art Nouveau 의 거장이 된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빈 분리파가 순수 미술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응용 미술을 옹호하는 사람들로 나눠지면서 마찰이 생기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한 클림트는 1905년 분리파를 과감히 탈퇴하고 그 자신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펼쳐나간다. 이 시기가 클림트 입장에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진정한 분리파의 시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혼자라는 자유의 날개를 단 클림트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펼쳐나가면서 여러 대작들, ‘키스 The Kiss 1907-08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년’ 등도 이 때 나오게 된다.

1910년대 촬영한 클림트 컬러 사진 Friedrich Walker ca 1910.


클림트의 나이 30세인 1892년에 함께 작업을 했던 동생 에른스트 Ernst Klimt 와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의 일종인 뇌일혈로 죽게 된다. 이때 의지했던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얻게 된 이후 작품 속에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많이 보이게 된다. 또한 자신도 아버지처럼 뇌일혈로 60살을 못 넘기고 죽게 될 거란 걱정을 많이 하는데, 이러한 두려움과 걱정이 작품 속에 죽음의 의미를 더 많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보인다. 그의 걱정대로 60 을 넘지 않은 그의 나이 56세인 1918년에 클림트는 대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뇌졸중과 폐렴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죽을 때 마지막까지 ‘에밀레를 데려와!’ 라며 찾았던 여인이 클림트의 키스 The Kiss 작품 속 여인인 에밀레 플레게 Emilie Flöge 였다.

키스와 에밀레 플레게 The Kiss & Emilie Flöge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냥 내가 클림트요, 나 이런 그림 그리는 사람이요, 하는 작품이다.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황금색 바탕에 황금색 옷을 입고 있는 두 연인이 서로 안고 키스를 나누고 있다. 아니, 입맞춤을 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그래서 더 설레인다. 살포시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잘 보이는 반면, 남성의 얼굴은 머리로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고 대신 화려한 의상 패턴으로 그의 이미지를 대신한다. 그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 누굴까? 두 손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화려한 키스를 화려한 꽃밭 위 낭떠러지 끝에서 나누고 있다. 아슬아슬한 느낌이 더 절정으로 가는 느낌이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사랑이 이처럼 위험한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서로 조금만 잘못해도 삐끗 깨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다. 키스는 클림트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사랑, 서로의 친밀감, 섹슈얼리티 등의 메시지를 모두 가장 잘 표현한 작품 중 하나이다. 비잔틴 미술의 모자이크에서 보이는 화려함과 아르누보 스타일을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작품 속의 여인이 누구일까는 아직까지 확실하진 않지만, 클림트가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죽은 동생 에른스트의 와이프의 동생이었던 처제 에밀레 플레게로 보는 게 지배적이다. 남자는 클림트냐 아니냐 이야기가 많지만 신체적인 특징을 봤을 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밀리 플레게와 클림트 Emilie Flöge and Gustav Klimt in Schörfling am Attersee, taken by Heinrich Böhler (1909). Public domain image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 있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 구스타브 클림트 Gustav Klimt, 1907, Neue Galerie New York, 뉴욕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

클림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다. 작품명에 I 이 붙었네? 맞다. 위 작품보다 5년 뒤인 1912년에 그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I 가 또 있다. 두번째 아델레 블로우 바우어 초상은 색채에 흠뻑 빠져 있던 시기의 작품인 만큼 화려한 꽃무늬와 동양적 느낌 물씬나는 패턴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한때 2006년 오프라 윈프리가 약 8,800만 달러(약 1,286억원) 에 낙찰 받아 소유하였으며, 다시 2016년 중국의 한 수집가에게 1억 5,000만달러 (약 2,195억원) 에 판매되어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클림트가 두번째로 그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I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I , 구스타브 클림트 Gustav Klimt, 1912, Private Collection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당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설탕으로 막대한 부를 이룬 유대인 사업가이자 은행가이면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컬렉터이기도 한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의 부인으로, 페르디난트가 클림트에게 자신의 와이프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여 그려진 작품이다. 아델레는 빈에서 사교계 스타로 페르디난트와 정략 결혼을 하였지만 세 아이가 모두 낳자 마자 또는 어릴때 죽고 본인도 43세의 젊은 나이에 뇌수막염으로 사망하는 슬픈 삶의 여인이다. 클림트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 에 유난히 금과 은을 많이 사용하여 공을 들였다. 화려한 패턴들은 비잔틴 모자이크의 문양들로 아직도 많은 원단과 스카프 등에서 ‘클림트 패턴’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 문양들 중에 눈과 삼각형 모양이 아델레와 클림트의 은밀한 관계의 사인이 아닌가 하는 소문도 있었다. 그림 속에서 왼손이 감싸고 있는 오른손은 아델레가 어렸을 때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다쳐 장애가 있었는데 그것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클림트의 따뜻한 배려로 보기도 한다. 이 정도로 많은 금을 발라 그린 여인은 사랑하지 않고는 힘들지 않을까?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려면 시간과 쓰는 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 그림에 들인 금과 시간을 보면 둘은 화가와 모델 그 이상이라고 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클림트의 작품 반환 소송 과정을 그린 영화 ‘우먼 인 골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 은 1938년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점령하에 오스트리아 정부에 강탈당하게 되는데 이후 페르디난트의 조카딸인 마리아 알트만이 숙모의 초상화를 되찾고자 2000년에 오스트리아 국가를 상대로 반환 청구 소송을 진행하게 된다. 이 소송의 가장 큰 쟁점은 아델레의 유언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아델레가 1925년 죽기 전 ‘내 초상화를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기증해 달라’고 유언으로 남겼으므로 국가 소유라고 주장한다. 상속녀인 마리아 알트만은 나치가 강제로 뺏어간 것이므로 유언보다 약탈 미술품 반환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 살고 있던 마리아 알트만이 이 소송을 2004년 미국 연방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자 오스트리아는 중재 위원회를 열어 2006년 이 작품을 포함한 5점 모두를 알트만에게 반환하라고 최종 판결한다. 판결 직후 이 작품이 있던 벨베데레 미술관은 이 그림을 떠나 보내기 전 마지막 전시회를 여는데 수천명의 오스트리아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작품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이 참 대단하다. 얼마나 떠나 보내기 싫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베데레 미술관은 ‘고통스럽지만 정의로운 반환’으로 기록하고 보낸다. 영화의 제목인 ‘우먼 인 골드’는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이 작품의 모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지은 또 다른 작품명이었다. 이후 이 그림은 화장품 기업인 에스티 로더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로널드 로더가 1억 3,500만 달러(약 1,520억원) 에 구매하여 당시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다. 로널드 로더는 뉴욕 맨하튼에 오스트리아와 독일 출신 화가들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미술관인 ‘노이에 갤러리’를 지어 이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가 모델인 너무나 유명한 작품 하나 더 보자. 클림트는 아델레를 참 많이 그렸구나.


클림트의 유디트 I Judith I, 구스타브 클림트 Gustav Klimt, 1901, 벨베데레 미술관 Belvedere Museum, Vienna


얼굴이 누가 봐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맞네. 머리에 힘을 많이 주셨네요. 금으로 그냥 아낌없이 칠을 했다. 이 정도면 사랑이다. 작품의 윗부분에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라고 써 있다. 이건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작품과 함께 보면 더 재미있겠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외경에 나오는 여인으로 아시리아의 장군인 홀로페르네스가 이스라엘의 베툴리아 성을 포위하여 멸명시킬려고 할 때 유대인 과부였던 유디트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적진으로 들어가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뒤 그의 침실에서 그의 목을 칼로 베어 승리를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보니, 왼쪽 아래에 장군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이나? 이제야 보이네, 섬뜩하다. 그런데 클림트의 유디트는 카라바조의 유디트와 사뭇 다른게 얼굴 표정이 너무나 평온해 보인다. 단호함도 없고 눈을 깔고 살짝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의는 한쪽이 완전히 다 오픈되어 있다. 클림트는 유디트를 왜 이렇게 그렸을까? 아마도 섹시함을 그리기 너무나 좋아하는 클림트는 유디트에서 영웅적인 여인의 모습보다는 적장을 유혹해서 목을 베는 관능적인 유혹녀의 모습에 더 초점을 맞춘게 아닐까? 그래서 옷을 벗고 있는 모습도 적장의 침실에서 유혹 후라는 것을 암시하고 표정 또한 유혹하기 위한 섹시한 표정을 더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생각이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클림트이다. 이 정도 해야 예술가라 할 수 있는 걸까?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약 1598-1599,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로마, 이태리



모든 예술은 에로틱하다

All art is erotic

-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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