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ques Louis David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자크 루이 다비드
The Death of Socrates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Oil on Canvas
129.5 x 196.2 cm
The Met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다비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1782년부터 연구했었고, 파리 의회의 부유한 고문이었던 찰스-루이스 트루데인 드 몽티니 Charles-Louis Trudaine de Montigny 의 의뢰로 약 10,000 리브 livres 를 받고 1787년에 이 작품을 완성한다. 같은 해 8월 25일 파리 살롱 Paris. Salon 전시에 출품하였는데,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고전적 소재와 조화로운 구성, 정교한 기교로 큰 사랑을 받는다. 그 후, 1794년 프랑스혁명 시기에 국가에 압수되었다가 여러 번의 소유주가 바뀌고 1931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영구 컬렉션으로 들어가게 된다.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우리는 아직도 ‘테스형’을 찾는가?
몇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테스형을 찾는다. 아직도 우리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있다. 왜일까? 소크라테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2,400여 년 전인 기원전 470년경(또는 469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기원전 399년 71세의 나이에 독배를 마시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이다. 이때의 그리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약 30여 년간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을 치르면서 스파르타에게 패한 후라 심각한 위기의 상황이었다. 아테네의 재정은 바닥이었고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피패해졌으며 시민 수 또한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전쟁 전 2만 5천여 명에서 9천여 명으로 확 줄어들었다.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에 길들여져 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30인 참주 정치’ 등 스파르타식 정치는 적응에 쉽지 않았다. 이러한 너무나 힘든 시기에 등장한 스타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시대와 비슷한 힘든 시대라고 생각하면 그때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현재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어떤 얘기를 했나 하고 소환하고 있다. 지금의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에 테스형은 뭐라고 답할까?
그림 보기 전,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기원전 399년,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타락시킨다는 ‘사회 문란죄’와 신을 부정하였다는 ‘신 모독죄’라는 두 가지 죄목으로 아테네 시민법정에 서게 된다.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억울함도 있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전달하는 방식은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 그 스스로 진리를 찾아가게 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산파술 Midwifery 이다. 산파, 내 안의 아이를 낳게 도와주는 사람처럼 진리는 결국 내 안에 있는데 그 진리를 낳을 수 있도록, 즉 계속적인 질문을 통해 나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을 말한다.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결국 나는 모슨 덩어리구나 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또한 이러한 산파술로 사람들에게 철학을 전파했던 끝에 도달한 진리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 즉, ‘무지(無知)의 지(知)’라고 한다. 자신은 단지 질문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계속적인 질문을 당하는 사람은 어떨까? 짜증이 나지 않았을까? 그 대표적인 집단이 아테네의 주류 지식인이었던 소피스트이다. 소피스트 Sophist 란 수사학, 웅변술, 변론술, 교양 등을 일반 시민들에게 가르치고 대가를 받던 사람들인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궤변가’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부르곤 했다. 소피스트들과의 설전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가 대답을 못 할 때까지 많은 질문을 던지며 면박을 주어 눈의 가시로 많은 질투와 질시를 받았다. 이와 같이 소피스트들의 분노를 많이 샀고 또한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맡기고 교양 있는 젊은이를 육성해 아테네를 다시 일으킬 인재를 키우자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많은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젊은이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젊은이를 현혹하고 타락시킨 죄’라 칭하게 된다.
신을 부정하였다는 죄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모든 행동이 마음속 신의 소리, 즉 다이몬 Daimonion 이 끌어낸 행동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두고 기존의 아테네의 신들 외에 ‘새로운 신을 끌어들여 현혹시키고 있다’라고 말해 신을 부정하고 모독하였다고 죄목을 붙인다.
두 번의 재판이 이루어지는데, 첫 번째 재판은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재판으로 무죄일 경우 첫 번째 재판에서 끝나고 죄가 있을 경우 두 번째 재판이 열어 죄의 형량을 결정하게 된다. 재판장에서도 배심원들에게 살려달라고 구걸하지 않고 당당함을 유지했던 소크라테스는 괘씸죄에 빠져 첫 번째 재판에서 총 501명의 배심원 중 281명 대 220명으로 유죄에 더 많은 배심원이 찬성표를 던진다. 두 번째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포기할 것인지 또는 추방 당해 아테네를 떠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독이든 잔을 마시고 죽을 것인지를 선택받게 된다. 미운털이 박혀 있던 소크라테스에게 배심원들은 겁만 주고 철학만 포기하게끔 할 생각이었다고도 전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도망갈 수 있는 허술한 감옥에 소크라테스를 가둬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주저함 없이 기꺼이 죽음의 잔을 택한다. 이것이 몇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캐릭터를 결정 지은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당당한 모습으로 남게 된다.
그가 죽음을 선택했던 또 다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육체는 유한하지만, 영혼은 무한하여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영원히 산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고, 죽음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죽음 앞에 두려워 하기는커녕 설렘까지 가지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 Apology of Socrates’의 마지막 장에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직전에 했다는 그의 말을 보면 그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는 우리가 떠날 시간이다.
나는 죽기 위해, 그대들은 살기 위해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저 신만이 알 것이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신고전주의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으로, 정말 많은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로 쓰이곤 한다. 누구 작품인지는 몰랐어도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은 드물 것으로 본다. 그림 하나는 끝내주게 그리는 화가이다.(이 말을 얼마나 많이 하게 될까?) 얼마나 잘 그린 작품으로 보는지, 이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죽음’ 장면의 그림을 그전에 많은 화가들이 그렸다는데 다비드의 작품 이후로는 나오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다른 화가들은 어떻게 그렸는지 한 번 볼까?
왼쪽: The Death of Socrates, François-Louis-Joseph Watteau, 1780, Palais des Beaux-Arts de Lille, France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실적인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프랑수아 루이 조셉 와토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오른쪽: The Death of Socrates, Giambettino Cignaroli, 1762, Museum of Fine Arts, Budapest
소크라테스를 십자가에서 갓 내려온 죽은 예수의 모습처럼 표현한 지암베티노 시그나롤리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세상의 모든 역사화, 영웅화는 허구
다른 작품과 비교해서 보니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 알겠다. 일단 인정하고 들어간다!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은 역사화이다. 역사화이자 영웅화이다. 이 작품을 포함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역사화, 영웅화는 모두 허구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다. 진정한 사실화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역사화가 픽션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영웅화는 기본적으로 영웅의 모습을 극대화시켜 주기 위해 더 오버스럽고 과장되게 그린다. 영웅화도 또한 허구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적인 사실과 안 맞는 부분들이 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작가의 해석이자 작가의 상상력, 작품력으로 보기도 한다. 기본적인 역사에 기반한 픽션 소설 정도? 그럼, 뭐가 안 맞는지 한 번 볼까?
소크라테스가 독당근으로 만든 사약인 햄록 Hemlock 잔을 마시고 죽은 해의 나이가 71세(또는 70세)이다. 아, 저 몸이 어떻게 71세의 할아버지 몸인가? 배의 식스팩이 너무나 선명하게 건강한 청년의 모습으로 소크라테스를 표현하여 누가 봐도 그가 주인공이고 영웅스럽게 보여지게 그렸다. 식스팩 라인 또한 뒤에 있는 벽의 라인과 맞춰져 있으며 복근의 십자 라인으로 이 작품의 중심이 그인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감옥 안으로 들어오는 빛 또한 비현실적으로 정중앙의 소크라테스를 스포트라이트처럼 강하게 비추어 주고, 그에게 점점 멀어질수록 서서히 어둡게 하여 신비감을 더해 그를 더욱 영웅화해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취하고 있는 제스처 한 번 볼까? 죽음 앞에 당당함을 끝을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포즈를 어떻게 그릴지 다비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은 햄록 잔을 집듯이 땅을 가리키고 있는 제스처는 다비드로 인해 소크라테스의 대표적인 포즈로 자리 잡게 된다. 다비드 또한 이 제스처는 고전 작품인 라 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영감을 얻는다. ‘아테네 학당’ 작품의 정중앙에는 서양 철학의 대가인 플라톤이 왼쪽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져 있다. 왼쪽의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며 저 위에 있는 이데아 Idea 가 본질이며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 정도라고 말하는 듯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며 현실 Realism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자연탐구를 중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각자의 왼손에는 그들 철학의 대표적인 서적 중에 하나인 플라톤에게는 ‘티마이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윤리학’ 책을 들고 있다. 이 두 철학자 대가의 대표적인 포즈를 소크라테스 하나의 몸짓으로 절묘하게 잔을 잡듯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스토리 안에 녹여내어 그려 넣었다. 다비드, 정말 그림 하나는 끝내주게 그리는구나!
손 모양을 자세히 보니, 르네상스의 또 다른 거장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본 듯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닿을 듯 말 듯한 두 사람의 손 모양을 소크라테스의 한 동작에 담아내었다. 이 정도면 그가 얼마나 클래식 한 그림, 르네상스의 거장들 그림에 진심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듯하다. 자신의 존경과 마음을 소크라테스 한 사람에게 모두 담아낸 듯하다.
소크라테스의 왼쪽 침대 한 켠에는 제자였던 플라톤이 차마 죽는 모습을 볼 수 없는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데 그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 아, 소크라테스보다 더 늙어 보이는 할아버지 모습으로 29세 청년 플라톤을 그려 넣었다. 더 놀라운 건 이 독배를 마시던 감옥의 그 공간, 그 시간에 플라톤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비드는 작품 속에 있지도 않은 플라톤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왜곡(?) 해도 되나? 작가적 상상력, 작가의 해석 정도로 봐주길 바란다. 소크라테스는 말로만 철학을 설파했을 뿐 그가 직접 기술한 책이 한 권도 없다고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그의 했던 말들을 알고 있는 걸까?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 관해 썼던 저술인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의 책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 이야기에서 너무나 중요한 플라톤을 빼놓을 수 없고, 다비드 또한 이 죽음의 장면을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 상상하였으며, 다비드가 너무나 좋아하기도 했다는 서양 철학자 대가의 모습을 가벼운 젊은이의 모습보다는 중후하고 무게감 있는 나이 든 모습의 플라톤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무채색의 그레이 로브 Robe 옷으로 그려 넣은 게 아닐까 싶다.
플라톤이 앉아 있는 의자를 자세히 보니 자크 루이 다비드의 이니셜인 ‘L.D’가 그려져 있다. 다비드의 작품에서 자신의 이름 서명은 종종 그가 존경하거나, 그와 동일시되는 인물로 삼고자 할 때, 그 인물의 아래 또는 주위에 그의 이니셜을 새겨 놓곤 한다. 현대의 장 미셀 바스키아의 그림에 있는 ® 표시와 같다고나 할까? 그의 플라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자신의 이니셜로 새겨놓은 게 아닐까 본다. 그 바로 앞에는 그가 썼던 저술을 상징하는 글 쓰는 종이와 펜이 널브러져 있다.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다 계산을 해서 그려 넣다니, 참 디테일한 사람이구나, 다비드.
소크라테스 바로 옆에 앉아서 소크라테스의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이는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크리톤이다.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혀 죽기 전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했던 친구이고, 또한 정의와 법률에 관해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이 서로 논했던 것을 정리한 플라톤의 저서 대화편 중의 하나인 ‘크리톤 Crito’ 책 제목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점점 약기운이 퍼지고 몸이 굳어져가자 크리톤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다음 말을 했다고 한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나 대신 갚아 주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약, 의술의 신으로 뱀이 감고 있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신이다. 당시에 병에 걸렸다가 나으면 이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죽음을 ‘삶이라는 병’에서 벗어나 나은 걸로 생각해 감사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한 게 아닐까 해석하기도 한다. 죽는 순간까지 이런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걸까? 죽음을 이렇게 설레어하는 사람이 또 있었나? 크리톤이 앉아 있는 의자를 자세히 보니 자크 루이 다비드의 이니셜인 ‘L.David’ 이 그려져 있다. 크리톤 역시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로 생각하고, 소크라테스를 옆에서 지지하는 친구, 다비드로 자신을 포지셔닝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림의 왼쪽 올라가는 계단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차마 보기 힘들었던 그의 아내 크산티페 Xanthippe (악처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니라는 설도)와 두 아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바로 옆 벽에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벽을 붙잡고 통곡하고 있는 제자인 아폴로도로스의 모습이 보인다. (플라톤의 책에는 너무 슬픔을 표하여 쫓겨났다고 하는데 다비드의 그림에는 그를 담았다.) 감옥을 빠져나가는 문을 자세히 보니, 미켈란젤로의 ‘아테네 성당’에서의 보이던 배경의 문이 오버랩되어 보인다. 다비드는 르네상스의 세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이렇게 자신의 하나의 그림에 담아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이든 햄록 잔을 건네는 이는 보통 간수가 그 역할을 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잔을 건네며 너무 슬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간수가 직접 행하지 않고 간수에게 잔을 전해 받은 그의 제자가 마지못해 건네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햄록 잔의 붉은색과 잔을 건네는 제자의 붉은색 로브를 맞추어 독이라는 강한 이미지를 그림 전체 안에 전달해 주고 있다. 어마어마한 디테일의 대가이구나!
신고전주의의 대가, 자크 루이 다비드
다비드는 초기에는 로코코 Rococo 미술의 대가 프랑수아 부셰 François Boucher 에게 그림을 배우다가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기반을 둔 로열 아카데미 Royal Academy에 다니게 되는데, 이 아카데미는 매년 우수한 학생에게 로마상 Prix de Rome 을 수여하여 로마에서 3~5년 체류할 수 있는 지원을 했다. 두 번의 낙선을 하고 단식 등을 통해 1774년 세 번째 로마상을 수상하여 1775년 10월에 이탈리아로 그림 공부를 떠난다. 1년을 더 연장하여 머물 만큼 1780년 7월에 돌아오는 5년 동안 다비드는 카라바조, 안니발레 카라치 등 이태리 거장들의 작품과 로마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고전적인 주제들을 많이 그렸던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 Nicolas Poussin의 작품에 빠지고, 특히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가 완성한 사조가 다시 새롭게(Neo=New) 고전(Classic)으로 돌아가자, 그 당시 너무 클래식한 그림에서 변질되어 화려한 색채와 장식성이 강한 바로크 Baroque, 로코코 Rococo까지 와 있는 트렌드를 돌려서 다시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으로 돌아가자는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를 빼고는 신고전주의를 논하기 힘들 정도이다. 신고전주의는 거의 그의 독무대이다. 신고전주의의 또 다른 대가인 앵그르 또한 다비드의 제자 중의 한 명이다. 이태리에 머물면서 다비드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천재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 영향을 받는데 다빈치의 대표 작품 중의 하나인 ‘최후의 만찬’을 한 번 보자. 이 작품에서도 다비드는 구도의 영감을 받는다.
두 구도의 닮음이 너무나 놀랍다. 정중앙의 예수 자리에 소크라테스가 놓여 있고, 3명씩 양 옆으로 2그룹씩 총 4그룹으로 구성을 같게 하였다.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지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도 잰듯한 놀라운 원근감 표현과 안정적인 구도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도 그대로 변형하여 보여지고 있다. 전혀 어색함과 부자연스럼 없이 그의 작품 안에 녹여내었다. 그가 얼마나 클래식한 작품에 심취했었는지 여실 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정도면 다비드 또한 천재의 반열에 놓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그가 연구했던 스케치들이 남아 있는데 한 번 볼까?
세밀한 드로잉 하나하나가 대단히 놀랍다. 손동작 하나, 위치 하나하나가 몇 번의 수정을 거친 흔적을 보인다. 옷감의 흐름 또한 안의 인체를 먼저 그리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이 느껴진다. 스케치와 이후에 어떻게 유화로 완성했는지 함께 보는 것도 너무나 재미있다. 다비드, 정말 그림 하나는 끝내주게 그리는구나!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의 대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름보다는 ‘나폴레옹’ 그림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말 타고 있는 너무나 멋진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화가가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 세상의 모든 영웅화 중에 이보다 더 멋진 영웅스러운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불가능은 없다’의 대명사로 만들어버린 다비드의 ‘나폴레옹’,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그림 하나는 끝내 주게 그리는구나…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알프스 산을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at the Great St. Bernard (Napoleon Crossing the Alps),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801, Belvedere
자크 루이 다비드는 ‘그림으로 정치한 화가’ 또는 ‘변절자’, ‘정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처음 다비드는 로얄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우고 그곳에서 로마상을 받아 이태리 유학을 가고 돌아와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왕정의 후원을 받는 잘 나가는 화가였는데, 1789년 프랑스혁명이 시작되면서 왕정의 반대쪽인 극단적 혁명파인 자코뱅 그룹의 일원이 되고, 그 그룹의 지도자이자 폭군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 당시 다비드에게 그림을 의뢰(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하기도 했던 왕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이네트의 처형에 관한 전국 대회에서 다비드는 처형 쪽에 표를 던진다. 이것을 두고 그를 변화한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로 보기도 하고, 아니면 시대의 변화를 이끈 열정적인 이상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후 혁명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그 또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다. 혁명 이후 새롭게 들어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는 감옥에서 그린 다비드의 그림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된다. 다비드 또한 나폴레옹을 처음 보자마자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알프스 산을 건너는 나폴레옹’, ‘나폴레옹 대관식’ 등 많은 나폴레옹의 영웅화와 그를 선전하는 그림을 그린다. 1804년 제국이 선포된 후 나폴레옹 아래에서 궁정화가로 정식 활동한다. 다시 한번의 ‘변절’이 일어난다. 또다시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루이 16세의 왕조를 잇는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자,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보나파르트 주의자 명단에 올라 가지만, 새로 들어선 루이 18세는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에 다비드를 사면시켜 주고 궁정화가 자리까지 제안한다. 하지만 다비드는 이를 거부하고 브뤼셀로 스스로 망명하여 죽을 때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몇 번의 죽을 고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끝내주게 그리는 그의 그림 실력 덕분이었다.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서 그 당시 그림 만큼 효과적인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그림으로 정치를 한 화가’일까, 아니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정치를 한 화가’ 일까?
일반적인 대관식에서는 교황이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데, 처음 스케치는 (실제 그랬던 것처럼) 직접 나폴레옹 자신이 왕관을 쓰는 것으로 그렸다고 한다. 나폴레옹 자신의 힘은 누구로부터 부여받지 않는 절대 권력이라는 메시지로, 교황을 무능한 모습으로 나폴레옹 뒤에 앉혀 버린다. 너무 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교황측의 컴플레인 때문이었을까? 이후에 다비드는 교황과 같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부인인 조세핀에게 왕관을 하사하는 느낌으로 바꾼다. 이 작품으로 다비드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당신을 존경한다’라는 말을 듣는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비드처럼 이 정도 왜곡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걸까?
다혈질이고 성격 급한 나폴레옹을 몇 시간씩 앉혀 놓고 그리는데 실패한 걸까? 아니면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걸까? 미완성된 나폴레옹의 모습이 그를 더욱더 신비롭게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인생에서 한 번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받아 보시길 바라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자료의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립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게시 중단 등을 원하시면 shaan@daum.net 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