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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도슨트북 Aug 21. 2024

메트로폴리탄, 드가의 14세 리틀 댄서

Edgar Degas 에드가 드가

From The New York Times

The Little Fourteen-Year-Old Dancer 14세 리틀 댄서

Edgar Degas 에드가 드가

1922 Cast 주조, 2018 Tutu 투투

Partially tinted bronze, cotton tarlatan, silk satin, and wood 부분적으로 틴트 된 청동, 면 모직물, 실크 새틴, 목재

 H. 97.8 x W. 43.8 x D. 36.5 cm


드가는 1881년 6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처음으로 왁스 조각상인 14세 리틀 댄서를 출품한다. 원래는 바로 그 전인 5번째 인상파 전시에 출품할 생각이었는데 완성도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드가가 갑작스럽게 취소하는 바람에 5회 전시회에서는 빈 유리 케이스만이 놓여지게 되었다. 전시된 드가의 첫 조각상을 보고 사람들은 ‘진정한 독보적인 현대적 시도’라고 좋은 평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충격과 혹평뿐이었다. 얼굴을 보고 원숭이라 하질 않나, 아즈텍 문명에 나오는 원시인 취급을 하지 않나, 극악무도한 성격을 가진 타락한 꽃이라고 하질 않나, 휴. 유리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고 메디컬 표본이라고까지 얘기한다. 단일 재료 한 가지만 가지고 만들지 않고 비단과 천으로 혼합 재료를 써서 만든 것을 두고도 이건 예술 작품이 아니라 천박한 의상실의 마네킹 같다고 조롱을 한다. 드가는 예상치 못한 뜻밖의 악평에 큰 충격을 받고 수치심과 모멸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 후, 드가는 다시는 조각상을 만들지 않고 대중에 발표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드가의 조각상은 단 한 번 만의 전시를 가지고 끝나게 된다.


드가는 마지막 생애 5년여 동안 눈도 멀고 은둔 생활을 하다시하며 살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찾은 드가의 스튜디오에서 약 150여 점의 왁스로 만든 밀랍 인형이 발견되었을 때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는 조각을 그만둔 게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계속 조각을 만들고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가 ‘리틀 댄서’ 의 에브라르 캐스트 Hébrard casts of Edgar Degas's Little Dancer. From artnews.com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던 드가는 1917년 세상을 떠난 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상속인으로는 남동생인 르네 드가 René De Gas 와 죽은 여동생 마거리트 Marguerite 의 네 자녀가 된다. 이 상속인들은 후에 드가의 스튜디오에 깨지고 미완성된 채로 널브러져 있던 약 150여 점의 왁스 조각품 중에 72개를 살려 청동으로 주조할 것을 결정하고 에브라르 Hébrard 주조소에 맡긴다. 사실 미국인 컬렉터 헤브마이어 부인이 드가가 살아있을 때인 1903년 드가의 스튜디오에서 14세 리틀 댄서 왁스 조각상을 보고 사고 싶다고 전하는데 드가는 청동상 또는 캐스트로 만들어 다시 팔겠다는 뜻을 보이게 되는데 그 드가의 뜻을 살려 청동 주조키로 한다. 각 조각품당 총 20개씩 한정 에디션에 한 세트는 상속인, 한 세트는 에브라르 주조소의 것으로 더하여 총 22개 에디션으로 72세트를 주조한다. 우리가 여행 다니면서 여기저기 미술관에서, ‘어 , 드가의 조각상이 여기도 있네? 저번 여행에서 갔던 미술관에서도 본 것 같은데?’ 하는 이유가 이 주조된 청동 조각상들 중에 하나를 말한다. 루브르 박물관이 그중 첫 번째 세트에 쓰여진 ‘A’ 세트를 획득하는데 실패하고, 드가의 절친이었던 미국 화가 메리 카사트 Mary Cassatt 의 전보를 받고  헤브마이어 부인 Mrs. Havemeyer 이 1921년 5월 파리의 갤러리 A.A. 에브라르 Galerie A. A. Hébrard 에서 열린 프리미어 전시 기간 동안에 획득하게 된다.



드가의 청동 조각상에 찍혀 있는 스탬프이다. CIRE PERDUE 는 왁스를 가지고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공정의 의미이며, A.-A.HEBRARD 는 주조를 한 에브라르 주조사의 설립자인 아드리앙-오렐리앙 에브라르 Adrien-Aurélien Hébrard 이름이다. 그 바로 옆에 71 은 총 72개의 청동상 중에 71번째 작품이며 G 는 각 작품당 A-T 까지 총 20개의 알파벳을 붙였는데 그중에 G 번째이다. 앞으로 드가의 청동 조각상 작품을 만나면 이 스탬프를 한 번씩 찾아보시고, 함께 간 친구들에게 설명해 줘도 좋을 듯하다.

From commons.wikimedia.org

위 14세 리틀 댄서는 72세트와 달리 73번째로 이후 별도로 작업하여 주조한다. 드가의 왁스 조각상 중 가장 사이즈가 컸던 위 작품은 에브라르 주조소에서 2개의 석고로 캐스트를 먼저 뜬다. 그것이 현재 하나는 미국 네브라스카 오마하의 주슬린 미술관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워싱턴 D.C 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그 석고상을 가지고 1922-1937년 동안 총 29개의 청동상을 만든다. 1922년에 첫 번째로 만든 청동상에 ‘A’를 표시하는데 이것 또한 헤브마이어 부인이 획득한다. 헤브마이어 부인은 ‘14세 리틀 댄서’를 포함한 이 총 73개의 A 세트에서 2개를 제외한  대부분인 71개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한다. 최근인 2015년 6월에 이 14세 리틀 댄서의 다른 버전이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거래가 되었는데 그 금액이 1,580만 파운드, 자그마치 우리나라 돈으로 약 280여 억 원에 낙찰된다.

From bbc.com


이 발레 댄서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이름은 마리 반 괴템 Marie van Goethem 으로 1865년생이라고 한다. 벨기에에서 온 재단사이자 세탁사의 딸인 마리가 태어나던 시기에 마리 가족은 드가의 스튜디오 근처인 브레다 지역 Place Bréda 으로 이사를 오는데 이 지역은 매춘이 많이 일어나는 낙후된 지역이라고 한다. 집세를 제때 내지 못해 여러 번 이사를 다니다가 드가의 스튜디오에서 몇 블럭 떨어진 몽마르트르의 루 드 두 아이 Rue Fontaine 에 정착한다. 마리는 에콜 드 댄스의 학생이었고, 이 작품이 만들어진 14세 즈음인 1879년에는 파리 오페라의 전문 댄서였다. 이 시기인 1879-1881년 사이에 드가는 마리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리고, 14세 리틀 댄서 왁스 조각상도 이때 만든다. 파리 오페라에서 발레 공연도 자주 보고, 댄스 학교에 자주 참관하여 스케치를 하곤 하였다고 한다. 마리는 돈을 벌기 위해 드가의 모델로 자주 섰던 것으로 보는데 그 당시 4시간당 약 5-6프랑 정도 벌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From thelucernehotel.com

나는 이 포즈가 너무 좋다. 발레 포즈로서 전형적인 두 손을 위로 모아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도 아니고, 한 다리를 들고 양팔은 쭈욱 벌리며 날아가는 듯한 포즈도 아니고 그냥 무대 밖에서 뭔가 시작할려고 준비하는 이 포즈가 좋다. 오른발을 앞으로 살짝 내밀고 있을 뿐인데 그냥 ‘나, 발레 하는 사람이예요’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손을 뒤로 잡고 서 있는 모습이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저, 춤 좀 추는 사람이예요-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표정은 또 어떤가? 지그시 눈을 감고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입은 꾸욱 다문 모습이 긴장감에 다음은 내 차례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당당해 보이기도 하다. 연습 많이 했잖아, 연습한 만큼만 하면 돼, 긴장하지 말고, 지금까지 한 것만 잘 보여주자, 라고 다짐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난 이 표정이 너무 좋다. 드가는 어떻게 이런 표정, 이런 포즈를 잡아 냈지? 드가, 내 스타일이다.

조각상에 왁스로 함께 포함하지 않고 따로 준비한 머리띠와 투투 Tutu 는 너무나 센스 있다. 과하지 않고 적당히 포인트만 준 거 같아 부담이 없다. 절제미까지 느껴진다. 여기에서 상의 옷까지 옷감으로 처리했다면? 노노, 그건 너무 과하지. 실크 머리띠도 일상에서 그냥 쓰는 머리띠 같아 친근해서 좋고, 투투 스커트도 연습용처럼 편해 보이고 자연스럽다. 여기서 잠깐 드는 생각이, 저것들은 패브릭이라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삭지 않나? 찾아보니, 안 그래도 이 패브릭은 처음 오리지널이 아니라, 왁스에서 청동으로 변하기까지 따로 제작하여 꾸민 것이라 한다. 지금 우리가 메트로폴리탄에서 보고 있는 투투는 2018년에 드가의 의도를 고려하여 색상을 맞추고 재단하여 제작한 스커트라고 한다. 시대에 따라 바뀐 머리띠와 투투 보내 재미도 있네.

왼쪽에서부터 1. 1922년 오리지널 스커트 2. 1968년에 교체된 스커트 3. 1998년 청동상의 첫 번째 스커트 4. 1998년 초기의 오리지널 왁스의 스커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스커트


왜 발레 댄서였을까?

약 1,500여 점의 발레 그림을 그린 드가를 보고 오해도 많이 한다. 발레 하는 댄서들의 나이가 어린 소녀이다 보니 어린 소녀 성애자가 아니니-부터 연습실에 들어가서 관찰하면서 그린 그림들을 보고 관음증이 심한 거 아니니, 또는 여성 혐오증에 사로잡혀 결혼도 하지 않고 여성에 집착하여 이렇게 많이 그린 거 아니니 등 참 많은 얘기들이 있다. 내가 직접 만나서 물어보지 않았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래 내용이 나에게는 조금 더 설득적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드가는 파리 은행가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누리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의 남동생 르네가 엄청난 사업 부채를 떠안게 된다. 그때 드가는 자신이 살던 집과 자신의 그림을 팔아 동생 부채를 갚는 데 사용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발레 하는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발레가 인기 있던 시가라 덩달아 발레 그림도 잘 팔렸다는 것이다.


또한, 드가는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삶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하층민의 삶을 주로 많이 그렸다. 목욕하고 닦아주며 머리 빗질하는 하녀, 모자 장식물 수공업자인 밀리너, 다림질하는 여인 등을 많이 그린다. 그중에 하나가 발레 하는 댄서이다. 그 당시 파리에서의 댄서는 가난한 하층민 사이에서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어린 소녀들을 많이 시켰다. 댄서로 성공할 수도 있고, 또한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눈에 띄어 성적 대상으로 스폰을 받아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수도 있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드가 그림 속 검정 정장을 입고 귀족처럼 보이는 남자들은 죄다 스폰을 미끼로 댄서 중에 누구를 꿰어 볼까 염탐하는 음흉한 눈들이다. 그러다 보니 어린 소녀들이 성공의 수단으로 혹독하게 연습하고 가혹하리 만큼 힘들게 교육받는 게 발레였다. 그 어린 소녀들이 발이 퉁퉁 붓고, 발톱이 다 빠지고, 발목이 나가서 서기조차 힘들고… 그래서 드가의 댄서 작품들은 화려한 무대 위 공연 모습보다는 어린 소녀들의 힘들고 고된 생활인 댄서의 모습이 주를 이루고 있다. 드가의 발레 그림에는 없는 게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인 발레 댄서가 없고, 또 다른 하나는 남자 발레리노 댄서가 없다.


더불어 드가는 발레 동작을 하는 댄서를 통해 신체의 동적인 움직임을 담고자 하였다. 정적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보다는 연습 중에 움직이는 신체의 동적인 모습을 담아내는데 더 집중하였다. 이것은 그가 했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나를 춤추는 소녀들의 화가라고 부르지.
댄서들에 대한 나의 주된 관심은 움직임을 랜더링 하고 이쁜 옷을 그리는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르지.

People call me the painter of dancing girls.
It has never occurred to them that my chief interest in dancers lies in rendering movement and painting pretty clothes.

Edgar Degas

드가는 진정 댄서를 통해 동적인 움직임을 담고자 했다. 그 연장선상으로 2차원 그림에 한계를 느껴 3차원적인 완벽한 동작을 나타내는 조각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발레 하는 조각상들을 보면 정말 동적인 포즈들이 많다. 그냥 정상적으로 서 있는 조각상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이다. 평면의 화폭에서만 표현하는 움직임에 답답함과 한계를 느껴 3차원 공간에 움직임을 표현하는 게 더 효율적이겠다 싶어 조각상에 관심을 가지고 손을 뻗은 게 아닌가 싶다. 드가가 느끼는 답답함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말이 있다.


그림은 형태와 같지 않고, 형태를 보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Drawing is not the same as form, it is a way of seeing form.

Edgar Degas

왼쪽: 드가가 직접 찍은 사진 Edgar Degas, Dancer Adjusting Her Shoulder Strap, c. 1895-96,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Paris, France.

오른쪽: 어깨끈을 조절하는 두 댄서 Two Dancers Adjusting their Shoulder Straps, Edgar Degas, 1897,  Fine Art America.


여기에 하나 더, 1822년에 최초의 사진이 발명되어 나오고 사진의 시작이 이 시기 즈음인데 1870년, 80년대에 드가는 사진에 푹 빠진다. 드가는 사진을 그림 그리는데 참고 자료로 적극 활용하고 구도와 구성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찰칵! 스냅숏 보는 것과 같은 살아 있는 사진을 보는 것처럼 느낌을 준다. 또한 클래식한 그림에서는 보기 드문 사진 프레임의 화면 자르기 등 새로운 형태들이 등장한다. 이것 보는 즐거움 또한 대단하다. 그럼 이제 그의 댄서 그림들 한 번 볼까?


댄스 클래스 The Dance Class, 1874, Edgar Degas,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아, 이 그림! 너무나 유명해서 그냥 반갑다. 드가 하면 항상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로 꼭 등장하는 작품이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작품이니 놓치지 말고 보시기 바란다. 어, 이거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봤던 그림인데? 같은 듯 다른 그림이니 비교해서 보아도 재미있다. 댄스 클래스란다. 모두들 열심히 연습 중인 듯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렇지는 않네? 다들 자기 일에 바쁘네. 여기는 파리 오페라의 리허설 룸, 그런데 사실은 바로 전 해에 불에 타서 없어진 룸으로 드가가 이전부터 들락 거렸던 그 공간을 생각하며 그린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 지팡이 들고 서 있는 할아버지가 유명한 발레 마스터인 질 페로 Jules Perrot, 그 바로 앞에 한 댄서가 동작 검사를 체크받고 있는 듯하다. 그 바로 오른쪽에 입가에 손을 대고 쳐다보는 소녀와 바로 옆 소녀가 그다음 체크받을 순서인가 보다. 그녀 바로 뒤에 포스터가 하나 보인다. 이 그림을 의뢰한 바리톤 가수 장 밥티스트 포레 Jean-Baptiste Faure 가 공연하는 오페라 로시니의 빌헤름 텔 Rossini’s Guillaume Tell 포스터이다. 이렇게 그림 속에 의뢰자를 배려한 아이콘까지 넣어 주었으니 너무 좋았겠다.


왼쪽 정면의 머리에 꽃을 꽂고 있는 소녀와 바로 뒤 소녀는 잘 안 되는 동작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듯하다. 악보는 보이지 않고 왼쪽 끝 소녀는 살짝 잘려 나갔다. 어? 악보 바로 밑에 커다란 베이스가 반쯤 잘려나간 채로 놓여져 있다. 이것이 드가가 사진 프레임에서 영향을 받은 화면 자르기이다. 보통 그림을 그릴 때는 어느 정도 정리해서 넣든지 빼든 지 하게 되는데, 이렇게 뚝 잘려 나가게 그려 넣었다. 그러고 보니 전체적으로 찰칵! 한 편의 스냅샷 처럼 느껴지는 그림이다. 오른쪽 저 뒤 스탠드에는 우리 딸이 열심히 하고 있나 지켜보는 엄마들이 앉아 있고, 엄마들 중에는 딸인 듯한 소녀 댄서와 얘기를 나누고 있고, 거기에서 살짝 왼쪽에는 목을 잡고 지루한 듯 서 있는 댄서, 바로 옆 벽에 기대어 자는 둥 얘기 나누는 둥, 바로 앞에 두 소녀는 앉아서 쉬는 와중에도 발끗은 세워서 긴장을 놓치는 않고 있다. 창문 너머 파란 하늘의 구름은 날씨는 좋은 날이구나. 디테일이 너무나 재미있네.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네.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에서는 왼쪽에 등 긁고 있는 소녀가 왜 이렇게 귀엽니? 그 소녀 밖에 눈에 안 들어오네!


댄스 클래스 The Dance Class, 1873-75, Edgar Degas,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무대 위의 발레 리허설 The Rehearsal of the Ballet Onstage, 1874, Edgar Degas,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와, 이 작품도 메트로폴리탄에 있었네! 이 작품은 전체를 유화로만 그린 것을 보이지만 자세히 보시면 파스텔로 흐뿌려져 그려진 것도 보이고 수채화도 사용한 혼합 재료로 그려진 것이 독특하다. 아, 14세 리틀 댄서에서도 왁스 조각상, 실크 머리띠, 투투 천 등 혼합 재료를 썼는데 이러한 시도를 그림에서도 했었구나! 혁신 적이네. 나는 왜 이 그림에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두 남자가 먼저 보이지? 검은 정장을 입고 한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리를 쭈욱 뻗어서 앉아 있고, 다른 남자는 의자 등받이를 앞으로 돌려 팔을 올리고 편하게 발레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다. 아니, 발레 하는 소녀들을 보고 있는 거겠지. 이 남자들이 아보네 abonnés 라고 하여 가난한 댄서들에게 돈을 대고 즐기려는 스폰서이다. 이 당시 파리에서 오페라 후원자 남성들은 이렇게 리허설에 들어와서 댄서들을 볼 수가 있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에스코트해서 같이 나갈 수 있도록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이러한 그림은 불편했나 보다. 이미지의 부적절성 때문에 이 그림이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Illustrated London News 에 거부되었던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봐도 음흉하네.


댄서들은 이런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네. 가운데 선생님은 두 팔을 올리며 열심히 세명의 댄서들의 동작을 봐주고 있고, 그 바로 왼쪽의 두 댄서는 다음 차례인 양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가운데 선생님 바로 옆, 하품하고 있는 댄서의 모습이 압권이네. 너무 재미있다. 찰칵! 순간의 포착! 스냅이네, 이 그림. 드가는 이렇게 하나씩 포인트를 넣어 주네. 다른 그림에서는 등 긁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응? 정면 가운데 앉아 있는 댄서도 등을 긁고 있는데? 하하. 하품하는 댄서 바로 앞에는 토즈인지 발인지 만지고 있고, 얼마나 아플까? 왼쪽에 세 댄서는 즐거운지 모두 웃고 있네. 이 리허설을 즐기고 있네. 그런데 맨 왼쪽 댄서는 거의 몸이 반이 날라가게 그려져 있네? 이것 또한 드가의 사진 자르기 기법이네. 찰칵! 스냅에서 보일 수 있는 프레임에서 잘려 나간 이미지. 클래식한 그림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요소이다. 이 기법의 절정이 그림 앞쪽에 베이스 악기의 머리만 크게 나오게 그려 넣은 컷이다. 그 아래가 오케스트라의 꺼져 있는 공간이다 보니 이렇게 머리만 넣어 보이게 그려 넣었다. 사진에 너무 빠지셨네, 드가 님. 위트도 있고.




바레에서 연습하는 댄서들 Dancers Practicing at the Barre, 1877, Edgar Degas,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갸악! 이 그림도 메트로~ 에 있다고? 이 정도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거의 드가 전시관 아닌가? 드가 발레 그림의 주요 작품이 정말 많다. 헤브마이어 Havemeyer 부인이 메트로-에 좋은 일 많이 하셨구나 싶다. 이 그림은 1877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컬렉터인 앙리 루아르 Henri Rouart 에게 드가가 원래 주기로 한 작품이 손상이 되어 대체하여 건네준 작품이라고 한다. 1912년에 헤브마이어 부인이 루아르에게 구매한 가격이 무려 $95,700 (약 13억여 원)으로 그 당시 엄청난 기록적인 비용이었다고 한다.


사실 드가의 발레 그림 중에 제일 좋아하는 그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이거다. 여러분은? 정말 혁신적이다. 일단은 구도가 파격적이다. 이 그림의 메인 중심이 텅 비어 있다. 그게 너무 좋다. 과하지 않고, 뭔가 가득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는 느낌, 휭 비워 있는 바닥이 이 그림의 주인공 같다. 과감하다. 그림에 자신감이 없으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나 그림 좀 그리는 사람이야, 따라와 봐! 하는 느낌이다. 이처럼 메인을 휭 하게 비워놓은 그림을 본 적이 있나? 그렇지만 또 우리의 시선을 그 공간에 그냥 머물게 놓아두지도 않는다. 댄서가 잡고 있는 바인 바레 Barre 의 라인, 벽면과 바닥을 잇는 나무 라인, 바닥의 나무판 라인 모두 오른쪽 위로 쭈욱- 우리의 시선을 끌고 올라간다. 그곳에 두 댄서를 두었다. 댄서를 오른쪽 위 귀퉁이로 확- 몰아 버렸다. 이 효과도 참 멋지다. 이 구도 또한 사진에서 습득한 기술이 아닌 가 싶다. 드가, 사진 잘 배웠네.


두 댄서가 바레를 잡고 연습을 하고 있다. 오른쪽 노란 리본을 차고 있는 댄서는 한쪽 다리를 바레에 얻고 쭈욱- 뻗어 있는데, 어, 이 자세? 왼쪽 바닥에 먼지 나면 뿌리라고 놓은 물뿌리개와 모습이 똑같네? 이건 정말 의도 아니고는 이렇게 그릴 수 없다. 드가, 장난꾸러기네. 그림에 과하지 않은 위트를 하나 둘 넣어 놨네. 하품하는 댄서, 응큼하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 둘, 등 긁고 있는 소녀, 여기서는 물뿌리개와 똑같은 소녀의 자세! 왼쪽에 있는 댄서도 마찬가지로 한쪽 다리를 올리고 연습하고 있는데 이 포즈, 오른쪽 댄서와 완전 대칭인 데칼코마니인데? 둘 사이를 접으면 둘이 똑같은 자세의 하나가 될 듯 보인다. 너무 재미있다.





자화상 self-portrait, 1857-58, Edgar Degas, 게티 센터 The Getty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1834-1917,

드가는 인사이더이면서 아웃사이더이다. 1860년대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같은 클래식한 그림에 푹 빠졌으면서도 1874년부터 1876년까지 총 8번의 인상파 전시회를 주도적으로 진행을 하고 자신도 직접 그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활동을 한다. 그래서 인상주의 작가로 분류가 되지만, 그렇다고 인상주의 작가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한다. 인상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야외에 나가 직접 햇볕 아래에서 풍경을 보고 그리는 외경, 그렇게 그리는 화가들을 외경 파라고 부르는데 이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엄청 싫어했다. 심지어 조롱까지 한다. 그래서 드가의 그림들은 거의 실내에서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자신을 인상주의자로 묶는 걸 싫어하고 언론에 비인상주의자들과 함께 분류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게 뭐야? 그럼 또 완전히 인상주의를 싫어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나중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땐 그가 좋아했던 엘 그레코, 잉그르, 들라크루아 그림들만 사지 않고, 더불어 자신과 함께 그림을 그렸던 마네, 카사트, 피사로, 세잔, 고갱, 반 고흐 등의 그림도 수집한다. 이게 뭐야? 그런데 이러한 그의 성향이 인상주의자 이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의 영역을 구축해 낸 게 아닌가 싶다.


From metmuseum.org

드가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가가 마네이다. 서로 친구이자 라이벌이 아니었을까 본다. 그래서 지금도 둘의 이름을 딴 전시회를 자주 보기도 한다. 드가 보다 두 살 더 많은 마네와는 186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림을 모사하고 있는 드가를 만나면서 둘의 우정이 시작된 것으로 얘기한다. 이때 마네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젊은 화가’ 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던 시기라 드가에게 조언하는 입장이었고, 드가는 마네로 인해 클래식한 그림에서 새로운 주제로 눈을 뜨며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드가도 마냥 마네가 하자는 대로만 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듯싶다. 1867년에 마네가 드가에게 런던 여행을 같이 가지고 하는데 드가는 거절하고 후에 따로 런던 여행을 떠난다. 드가가 마네를 그려준 그림이 하나 있다. 여느 때처럼 매주 목요일 저녁 모임에서 마네는 소파에 누워있다시피 비스듬히 앉아 있고 그 바로 옆에서 마네의 부인 수잔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그게 좋아 보였나 보다. 이 수잔 린호프는 네덜란드 태생의 피아노 선생님으로 처음에 마네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 교사로 고용하였는데 후에 마네의 와이프가 되고, 둘 관계를 아버지에게 숨기고 같이 살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에 결혼식을 올린 걸 봤을 때 아버지와도 그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그런 얘기도 있고, 어흑.


아무튼, 드가가 그러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마네에게 선물하는데 후에 마네의 스튜디오에서 수잔 쪽 그림이 찢겨져 나가 있는 그 그림을 발견하고 화가 난 드가는 그 그림을 다시 달라고 해서 들고 나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쪽이 찢겨진 그 그림만 볼 수 있다. 그런데 마네는 왜 수잔 쪽을 찢었을까? 어떤 평론가는 권태기에 빠져있던 마네 부부의 모습을 날카롭게 잘 집어내어 그림에 담은 드가에 대한 미움과 질투가 아니었을까 보기도 하는데, 음… 아니면, 수잔을 너무나 이쁘게 그리고 자신을 넘 못 생기게 그려서? 독신인 드가가 수잔을? 이 자식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여러분의 즐거운 상상은?

Monsieur et Madame Edouard Manet, 1868-69, Edgar Degas, 기타큐슈 시립 미술관 Kitakyushu Municipal Museum


아직 내 스타일을 찾지 못해서 난 즐거워. (그렇지 않다면) 난 지루해 죽을 거야.

I'm glad I haven't found my style yet. I'd be bored to death.

Edgar Deg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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