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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아 Dec 18. 2023

퇴근길

바닥에 눌어붙은 턱을 살살 떼어내고 욕을 잔뜩 먹어 빵빵해진 가방을 챙긴다. 일하는 상사를 뒤로 하고 퇴근하는 사람의 패딩은 얼굴만큼 두껍다. 카페인에 절인 뇌가 만세를 부르지만 폐인은 만사가 귀찮다. 20분에 한 대 오는 버스는 만원이고, 가는 데 20분 걸리는 택시는 만 원이다. 나는 합리적인 인간이므로 20분 걸어야 나오는 지하철 역으로 간다.



'삑'

'감사합니다'

사람이라면 나도 감사하다고 대답하겠지만 상대는 기계이므로 인사는 생략한다. 지하철 안은 시끄러워 음악을 못 듣지만 이어폰은 귀에 꽂는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표정을 애써 짓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는 집중해야 한다. 점멸하는 안내판은 정작 중요한 순간에 어디 역인지 알려주지 않고 헛소리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역사에 붙어 있는 마트에 들러서 아무 맥주를 산다.  나는 취향이라고는 없는 무 그 자체인 사람이므로 무도 바구니에 넣는다. '요고 드셔보세요옹' 홍보하는 이모님이 건네주는 만두에 잘게 갈린 고깃덩어리가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투 플러스 원 행사 중이라고 한다. 4분의 1조각의 만두를 받아먹은 죄로 100여 개의 만두가 딸려왔다. 등이 굽은 냉동새우를 보는데 나이 사십에 오십견이 온 내 어깨가 들썩인다. 집 냉장고에서 버터가 버티고 있는 게 생각났다. 같이 녹여 먹으면 내 몸도 사르르 녹겠지. 30% 할인 중인 샌드위치는 이리저리 치이는 내 신세 같다. 동족은 먹을 수 없으므로 사지 않는다.



양손 무겁게 집에 가는데 눈앞에서 보행자 신호가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뀐다. 이제부터 2분 40초를 기다려야 한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얼굴에 싸다구를 날리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로 옆에선 광고 풍선이 온몸을 뒤흔들며 체육관을 홍보하고 있다. 평소에 운동을 전혀 안 하는 인간은 뜨끔해진다. 숙제를 안 하고서 했다고 말하는 초등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들킨 건지 전단지를 나눠주던 건장한 남자가 말을 건다. 오픈 기념 할인 중이라고 다. 눈치 빠른 신호등이 색깔을 바꾼다. 다음에 가겠다고 말하고 빠르게 걷는다. 그 남자도 나도 알고 있다. '다음'의 다음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이름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시 만날 '다음'은 오지 않을 것을.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딸보다 겨울무를 반긴다. 무 하나쯤은 옆구리에 끼고 가야 슈퍼스타 대접을 받는 집안이다. 내 하루를 다 지켜봤을 옷을 서둘러 세탁 바구니에 넣는다. 계속 입고 있다가는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다 이를 것 같다. 엄마는 이모의 칠순 잔치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한다. 이미 하루치 청각 용량이 다 찼으므로 제대로 듣지 않고 그럴 만도 하다며 만두를 굽는다. 적당히 괜찮은 퇴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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