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 완성 후 일부 변제,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인가?
– 대법원, 57년 만에 판례 변경… “추정 법리는 폐기”
2024년 6월,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2023다240299)을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법리를 전면적으로 폐기하였다. 바로 ‘시효완성 후 채무자가 채무를 승인하면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른바 '추정 법리’에 대한 판례의 변경이다.
그동안의 판례는 채무자가 소멸시효가 완성된 뒤 채무를 일부 변제하거나 채무를 승인하는 등 일정한 행위를 하면, 그가 시효완성 사실을 인식하고 자발적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해 왔다(대표적으로 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2173 판결 등). 그러나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와 같은 법리를 “경험칙에 근거하지 않은 이례적 해석”이라고 지적하며 폐기했다. 판례 변경은 무려 57년 만이다.
시효이익 포기, ‘추정’ 아닌 ‘입증’의 문제
이 사건은 원고가 피고로부터 차용한 금원 중 일부에 대해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가 피고에게 일부 금액(1,800만 원)을 변제한 사실이 있는 경우, 이를 이유로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되었다.
대법원은 단호했다.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하였다고 하여, 이를 두고 곧바로 시효완성 사실을 인식하고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추정 법리’의 타당성을 부정하였다.
경험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시효완성 여부는 기산일, 중단·정지 사유 등 복잡한 법적 판단을 요하며, 단순히 시간이 지났다고 채무자가 시효완성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시효이익 포기 의사까지 추정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소멸시효가 완성되기 전의 채무승인은 단순한 사실관계 인식에 불과하지만, 시효완성 이후의 이익 포기는 불리한 법적 효과를 스스로 선택하는 ‘효과의사’가 요구되는 법률행위다. 이를 동일선상에 놓고 추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권리 포기와 같은 중대한 의사표시는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대법원은 기존에도 손해배상청구권이나 동시이행항변권의 포기 등 중대한 불이익이 수반되는 의사표시는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럼에도 ‘추정 법리’는 포기의 의사표시를 단순한 행위로부터 가볍게 추정함으로써 이러한 원칙에 반한다고 지적하였다.
소멸시효 제도의 본질을 훼손한다.
소멸시효는 법적 안정성과 채무자 보호를 위한 제도로, 민법 제184조는 시효이익의 사전 포기를 금지하고 있고, 그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도록 특별히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단순한 채무승인을 이유로 시효이익 포기를 인정하게 되므로 제도의 취지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
법리는 바뀌었지만, 판단은 여전히 ‘개별적 사정’에 따라
이번 판결은 단순히 추정 법리를 폐기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대법원은 명확히 선언했다.
“시효이익 포기가 있었는지는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요소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일부 변제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동기, 경위 및 자발성
변제 당시 시효 완성 여부에 대한 인식 가능성
변제액과 전체 채무액의 비율
변제 당시와 전후의 언행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 및 법률지식 정도 등
이러한 기준은 시효이익 포기의 판단을 단순한 ‘형식’이 아닌 ‘실질’에 의하여 하겠다는 선언이다.
판례 변경의 의의와 우려에 대한 시선
이번 판결은 시효제도의 본래 목적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금융소비자 보호의 관점에서 중요하다. 그간 대부업체나 채권추심업체가 시효가 완성된 채권에 대해 일부 변제나 채무확인서를 받아낸 뒤 시효이익 포기를 주장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번 판결은 그러한 실무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모든 대법관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다수의견에 대해 노태악, 오석준, 이숙연, 마용주 대법관 등은 별개의견을 내고 “추정 법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리를 오해한 원심의 해석이 문제일 뿐”이라며 판례 변경에는 반대하였다. 추정 법리는 반증 가능한 사실상 추정에 불과하고, 여전히 실무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마무리 – "권리 포기는 신중해야 한다"
이번 판례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권리나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는 의사표시는 그만큼 엄격하고 신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시효이익 역시 마찬가지다.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나 채무승인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시효이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로 해석될 수는 없다. 법은 채무자가 자신의 권리를 모르고 잃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야 하며, 이는 실무뿐 아니라 판례 법리에서도 철저히 관철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