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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Apr 14. 2024

내 기억 속 고고했던 순간

나를 기다려주는 곳


내 기억 속 고고했던 언니는 풀어헤친 하얀 백발을 질끈 동여매고 앞마당에 펼쳐진 꽃들에게 긴 호스를 잡아당기며 물을 뿌리고 있었다. 켜켜이 앉은 자기 이름을 가진 꽃들에게 예쁘다 인사하며 미소를 맘껏 뿌려댄다. 어릴 적 봐 왔던 언니의 모습보다 꽃과 함께 있는 그 모습이 더 고고했다.

언니의 꽃밭에서ㆍ자란

 정갈하게 놓인 돌담 위에 정갈한 꽃잎이 살짝 어깨를 어루만지듯 곱게 피었다. 어쩜 이리도 고울까. 나보다 훨씬 컸던 언니는 나보다 아기 같은 손길로 우리를 토닥여준다. '잘 자라줬구나' 한 손엔 그리움을 담고 한 손엔 사랑을 담아 진실한 눈빛을 보내며 하얀 이를 드러내 웃어준다.

어쩜 저리도 곱게 늙어가고 있을까. 언니, 그 어린 시절 술로 애교를 부리시던 아버지를 피해 언니집으로 왔을 때 따뜻한 고구마 하나 건네주셨는데.


 "언니,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럼, 네가 그 아이, ㅇㅇ아니냐?"

 맞죠, 언니.

 삼십 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보냈지만 고향은 어디를 가든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고고했던 언니도, 떠나려 마음먹었던 고향 땅도 아름드리 꽃들보다 더 반가운 마음으로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엄마가 남겨주신 내 터에 친구가 토마토, 가지, 고추 등 갖가지 모종을 심어놨다. 동네 친구들에게 오며 가며 물도 좀 주라며 톡을 남겼다. 반가운 일이다.

가지런히 심긴 모종들을 보면서 돌아갈 터전이 있다는 것에 어린아이가 된 듯 마음이 따뜻했다. 그곳에 오래도록 숨어 있어도 안심할 수 있는 언저리 같지만 포근함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얼마나 더 찾아갈까 싶어 묵혀두었던 땅이 생명을 틔우고 있다.


 나는 엄마의 터를 버릴 수 없다. 이미 부서지고 넘어진 곳이지만 쉽게 돌아서질 못한다. 뭐 하러 갖고 있냐고, 팔아버리라고 주위에선 그러지만 그곳은 내게 또 다른 집이다. 작고 아담하게 몸 하나 뉘일 곳만 있으면 된다. 크지 않아도 좋다. 가끔 친구들 놀러 와 커피 한 잔 나누고 쉬었다 가도 좋을 그런 곳이 필요하다.  친구가 그리 만들어 준단다. 고맙다. 저리 이쁜 생명이 싹을 틔웠는데 어찌 이쁘지 않을까.

언니의 꽃밭에서

 돌담 사이로 핀 이름 모를 보라꽃이 너무 정겹다. 엄청나게 커 보였던 언니의 집이 손아귀에 닿을 듯 작고 아담하다. 키 낮은 대문을 들어서니 아담한 초록 단풍나무가 반긴다. 정갈함이 돋보인다. 그 넓었던 마당에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를 심어 매일을 함께 하고 있단다. 하늘 향해 피어나는 자목련도 여느 나무와는 달리 분재를 한 듯 주인 닮아 고고하다. 조카를 키우며 엄마를 자처했던 언니는 예쁘게 늙어가고 있었다.


 왜 아프지 않았으랴. 아프고 나니 건강이 절실하더라며 내게도 건강하라 전한다. 어느덧 20년이 흘렀건만 그때의 아팠던 마음은 지금도 아련하다고. 묻지 않았다, 굳이. 무슨 병이었냐고 묻는 대신 언니의 고운 손을 나도 모르게 살며시 잡았다. 지금껏 살면서 언니의 손을 잡아보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너무나 친근하게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언니의 꽃밭에서ㆍ청화쥐손이

나이가 들어가니 모든 게 자연스럽다. 어머 꽃이 너무 예쁘다, 날려버리는 탄성이 아니다. 정말 예쁘다고 나오는 맑은 감탄의 탄성 소리다. 부끄러움보다 친숙함이 앞선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남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더 친근했다. 동네 어른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자주 오라는 말 한마디에 울컥 심장이 멎을 뻔했다.


  묵혀두었던 땅에 생명을 틔우고 있는 텃밭을 보며 이제는 사라지게 놔두는  곳이 아닌 내가 더 마음을 줘야겠다는 확신에 가슴이 멍했다. 나는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상상도 했다. 서서히 퇴색되어 가는 기억뿐이지만 상처에 약을 바르고 빈 구멍에 그리움을 담아 켜켜이 돌담을 쌓아야겠다. 엄마 아버지가 마중 나와 주시겠지.


#어린왕자의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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