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정답을 가르치는 교육과 혜답(지혜로운 답)을 찾도록 돕는 교육이다. 전자는 객관적 정답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후자는 개인이 스스로 답을 구성해갈 수 있도록 돕는 구조다. 두 교육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성과 객관성을 조화롭게 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병행되어야 한다.
삶은 항상 균형을 요구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면 판단력과 사고력에서 왜곡이 발생한다. 교육은 비판력을 길러야 한다. 비판은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방향을 향한 점검과 탐색이다. 좋은 것에 대한 비판은 진보의 시작이며, 나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방향 수정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비판을 장려하지 않는 편이다(대부분 객관식 시험 위주이기 때문). 특히 철학적 사고나 비판하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다. 위대한 이론이라도 질문하고, 다시 검토하며, 넘어서려는 시도 속에서 학문은 발전한다. 철학을 공부한 대부분의 이들이 비판에 거리낌이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비판은 사고의 확장을 유도하는 작용이다. 단순한 말 주고받음이 아닌,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철학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당연한 것에 도전한다. 철학적 교육은 지혜를 사랑하는 동시에, 지혜를 성장시키는 방식이다. 따라서 철학적 교육은 주체성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어린아이들은 질문한다. 왜 그런지 묻고, 스스로 이유를 찾고자 한다. 교육은 이 질문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아이는 비판을 기반으로 한 창의성과 생산성을 갖게 된다. 반대로, 이를 억누르면 아이는 부정과 비관 속에 머무르게 된다.
문제는 윗세대가 자신의 경험만으로 교육하려는 태도에 있다. 이는 대표적인 교육의 모순이다.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다음 세대를 이끌 수는 없다. 자식은 부모와는 다른 독립된 인격체이며, 살아가는 시대도 전혀 다르다. 단순한 주입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소통이어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비판하는 일은 부정이 아니라 성장과 이해의 한 과정이다. 그 비판이 존중을 바탕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교육의 모습이다. 자식은 부모에게도 배려와 소중함의 개념을 배운다. 존중은 지나치게 되면 자만으로, 부족하면 무시로 변질된다. 균형 있는 존중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은 단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래로부터의 교육, 즉 자식이 부모를 교육할 수 있다는 개념 역시 중요하다. 현대 사회는 과거와 달리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정보의 흐름과 사상의 전환 속도도 과거보다 훨씬 빠르다. 이에 따라 자식이 부모를 돕고, 설명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모가 자식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자식 역시 부모를 ‘답답한 존재’로만 규정해버리는 이중의 착시현상에 빠질 수 있다. 부모가 답답한 이유는 환경적 영향일 수 있으며,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고 해서 단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한 이해와 포용 역시 교육적 상호작용이다.
세대 간 교육은 상호적이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려는 것만큼, 자식 역시 부모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그 전달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감정적 대응보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산물이며, 그 안에서 형성된 사고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인 이해와 상호작용은 때때로 사람을 바꾸는 큰 힘이 된다.
이 장에서 다 다루지 못한 교육심리나 구체적 교수법에 대해서는 추후 더 깊이 다루어야 할 주제다. 현재는 일부 이론만 접한 상태이며, 예컨대 다중지능이론 등은 향후 참고할 수 있는 유의미한 방향성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