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이해

– 상향의 이해 가능성에 대하여

by Kn

한때 나는 ‘좋은 아버지’라는 개념에 공감하지 못했다. 내게 아버지는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었고, 그로 인해 형성된 감정은 다양한 부정적 관념으로 이어졌다. 타인의 아버지를 부러워했고, 나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아버지를 점차 부족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시기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이 감정은 과연 일방적인 피해의식이었을까?”
“나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면은 없었을까?”


이해는 단지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모-자식 관계는 생물학적으로 선행된 존재가 후속 존재에게 영향을 주는 구조를 갖지만, 이해의 방향성은 반드시 상하로 고정될 필요가 없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부모는 일반적으로 한정된 환경 안에서 긴 세월을 살아온 존재다. 하나의 직업, 하나의 가정, 한정된 인간관계 속에서 시야는 자연스럽게 특정 방향으로 고정되기 쉽다. 특히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적 문화와 주입식 교육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어, 이러한 구조가 더욱 고착되기 쉬운 환경이다.

그 결과 부모의 경험은 진리처럼 전달되며, 자식은 독립된 존재로 보기보다 ‘이끌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 가르침이 일시적으로 자식에게 유효한 긍정의 감정을 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20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모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부모의 과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해의 방향은 충분히 아래에서 위로도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말과 태도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 환경의 결과임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리고 그 시도는 때로 관계를 복원하거나, 나 자신의 내면을 다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해는 상호작용이다.
자식은 부모를 향해, 후속 세대는 선행 세대를 향해 이해를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도는 개인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세대 간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 장에서 구체적인 사례는 조심스레 생략하려 한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이해란 반드시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해는 상대의 변화가 아니라 나 자신의 변화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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