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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그막의 즐거움

주광일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늘그막의 즐거움



시인 주광일




젊은 날 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 한번 시의 깊은 늪에 빠지고 나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 젊은 날의 나는 얼마나 비겁했던가! 얼마나 미련했던가!

이제 뒤늦게나마 철이 들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졸시나마 읊조리며 살고 있으니, 밥을 한 끼 두 끼 굶더라도 배 고픈지를 모르겠구나.

아, 여든 너머 살면서 누리는 늘그막의 즐거움이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주광일 시인의 삶은 한 마디로 시와 멀어진 젊은 날의 고뇌와, 노년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시를 통한 해방감을 찾은 여정을 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시의 늪에 빠질까 두려워 시를 멀리했지만, 나이 들면서 비로소 시를 다시 품으며 자신을 잃지 않고 삶의 참된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세속적인 성공보다도 내면의 평화와 자기표현의 가치를 중요시한 결과이다. 그가 시에서 드러내는 진솔함과 깊이는 바로 그의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시에서 드러나는 철학적 사유와 그 감성은, 마치 굶주림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깊이 있는 깨달음을 보여준다.

첫 구절인 "젊은 날 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는 시인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동시에, 그 시절의 자신이 시와 멀어진 이유를 고백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시를 쓰지 않았다'는 말은 단순한 사실적 서술이 아니라, 시적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과 후회로 해석된다. 시를 쓰지 않음으로써 무언가를 잃었다고 느낀 그 시절의 자신이 얼마나 미숙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인생의 선택에서 두려움이 작용했음을 나타내며,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불안과 소극적 태도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로 들린다.

"한번 시의 깊은 늪에 빠지고 나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구절에서 '깊은 늪'은 시의 세계가 얼마나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할 수 있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는 시인의 삶에서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깊이 빠져들어갈 수 있는 인생의 한 지점임을 암시한다. 이 늪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 자신을 잠식해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상징한다. 즉, 시인은 젊은 시절 현실적인 걱정과 생계의 압박 속에서 시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는 예술과 현실의 갈등, 이상과 생계의 상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아, 젊은 날의 나는 얼마나 비겁했던가! 얼마나 미련했던가!"라는 구절은 자기 비하와 후회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비겁'과 '미련'이라는 단어는 시인이 젊은 시절 자신의 선택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비겁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의 두려움이었고, 미련하다고 느낀 것은 그 두려움에 휩쓸려 자신의 진정한 길을 포기했던 것이다. 이 문장은 시인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진정한 후회와 통찰을 얻은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 "이제 뒤늦게나마 철이 들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라는 구절에서, 시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비로소 자유로워진 자신을 이야기한다. '남의 눈치'는 젊은 시절 그가 두려워했던 사회적 평가와 시선을 의미하며, 이를 벗어던진 현재의 자신은 더 이상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사회적 성공보다 개인적인 만족과 내면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시인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졸시나마 읊조리며 살고 있으니"에서 사계절은 인생의 다양한 단계를 의미하기도 하며, 계절에 상관없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시가 이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삶의 일부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졸시나마'라는 표현은 겸손함을 드러내지만, 그 안에는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시의 완성도나 평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시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밥을 한 끼 두 끼 굶더라도 배 고픈지를 모르겠구나"라는 구절은 물질적인 궁핍보다도 시를 쓰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제 육체적인 굶주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시를 쓰는 것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찾게 되었다. 이는 젊은 시절 그가 두려워했던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대비를 이루며, 그의 인생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마지막 구절인 "아, 여든 너머 살면서 누리는 늘그막의 즐거움이여"에서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은 삶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늘그막의 즐거움'은 젊은 시절 경험하지 못했던 시적 자유와 자기표현의 기쁨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시인은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 구절은 그가 비로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시를 통해 얻은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의 감성적 측면은 단순히 개인의 후회나 성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동시에, 독자에게도 삶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내면의 자유와 만족에서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미지의 중요성 또한 이 시에서 두드러진다. '깊은 늪', '봄 여름 가을 겨울', '배고픔', '늘그막의 즐거움' 등의 이미지는 시인의 철학적 사유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단순한 단어 이상의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하며, 독자가 시의 감정과 철학을 더 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주광일 시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제의식은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 내면의 충족에서 온다'는 철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세속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노년기에 이르러 시를 통해 삶의 진정한 기쁨을 깨달았다. 그의 시는 이와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 성찰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





여든을
함께 사는
한 노인이
주광일 시인의 진솔함에
감동하여 보내온
글이다.




주광일 시인님께,

안녕하십니까. 여든을 넘긴 한 노인이 이 글을 통해 시인님께 작은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이렇게 무언가를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인님의 시, 특히 「늘그막의 즐거움」이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리는 것을 느꼈고, 그 울림이 저를 움직여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우선, 시인님의 시를 읽고 느낀 첫 감정은 '동질감'이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삶이란 그렇게 열심히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면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글쓰기를 좋아했고, 책을 읽는 것이 큰 기쁨이었으나, 현실의 무게에 밀려 제 자신을 오랫동안 묻어두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시인님의 시를 읽으며, 그때의 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마치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던 시인님의 젊은 날 이야기는, 저 역시도 두려움과 걱정 속에 제 꿈을, 내면의 소리를 억누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저 또한 젊은 시절에는 시를 쓰거나 문학을 가까이하는 일이 결국에는 저를 생계의 위험에 빠트릴까 두려워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시인님의 "한번 시의 깊은 늪에 빠지고 나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라는 구절이 저에게는 마치 제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실, 노년의 시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제가 이룬 것들, 그리고 제가 잃은 것들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이 많으니 언젠가 내 꿈을 다시 꺼내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은 그리 기다려주지 않더군요. 어느덧 삶의 많은 부분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제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인님의 시에서는 저와 비슷한 과정이 느껴졌습니다. 젊은 날의 시를 두려워하셨던 시인님도 결국엔 노년의 시기에 이르러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셨고, 그것이 큰 기쁨이 되셨다는 점이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계절에 상관없이 시를 읊조리며 사신다는 시인님의 고백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 또한 이제는 세상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저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시인님께서 말씀하신 '늘그막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시인님께서 '밥을 한 끼 두 끼 굶더라도 배 고픈지를 모르겠구나'라고 하셨을 때, 저는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곧 물질적 풍요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먹고사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문제였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게 된 것은, 우리의 진정한 배고픔은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결핍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시인님께서 시를 통해 그 결핍을 채우시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보니, 저 또한 그 의미를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여든이 넘었고, 시인님과 같은 시인은 아니지만, 남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살고자 합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고 나서,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시인님께서는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자유로워지셨다는 점에서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저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시인님의 시에서 배운 바가 크니, 분명 제 삶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또한 시인님께서 '늘그막의 즐거움'이라고 표현하신 그 기쁨은,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결국 도달해야 할 진정한 행복의 형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이제야 그 기쁨을 조금씩 느끼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더 분명하게 보이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고 나서, 저도 작은 시를 하나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시인님처럼 훌륭한 시를 쓰지는 못하겠지만,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작은 시 한 편이 제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 한 편에 내 삶을 담기 어려웠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님께서 주신 용기 덕분입니다.

끝으로, 시인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를 통해, 시인님의 삶을 통해 저에게 이렇게나 큰 감동과 위로를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시인님의 삶의 여정과, 그 끝에서 찾은 진정한 기쁨이 저에게도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저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늘그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합니다.

시인님께서 더 많은 시를 쓰시고, 그 시를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앞으로도 시인님의 시를 기다리며, 저 또한 작은 시를 쓰는 노인이 되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든을 넘긴 노인이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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