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끝자락에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까지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Aug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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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끝자락에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까지
청람 김왕식
여름의 끝자락은 언제나 내게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뜨거웠던 한여름의 햇살이 서서히 수그러들고, 그 틈새로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나의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진다.
이맘때가 되면 늘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할머니.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사랑 많고 지혜로웠던 할머니는 내가 성장하는 동안 언제나 나를 곁에서 지켜봐 주셨던 분이다. 그러나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은 나에게 깊은 아픔과 동시에 감사함을 남겼다.
할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신 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고,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할머니가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 달려가지 못했다. '괜찮으시겠지, 곧 나아지실 거야'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보내던 어느 날, 할머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지만, 이미 할머니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병실 안은 고요했다. 침대에 누운 할머니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감고 계셨다. 나는 그 곁에서 멍하니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었지만, 그 손은 내가 기억하는 따뜻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손수 챙겨주셨다. 학교에 다녀오면 할머니는 마당 한쪽에 있는 작은 꽃밭에서 나를 기다리시곤 했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손수 가꾼 작고 예쁜 꽃들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늘 그 꽃들 사이에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하곤 하셨다.
삶은 옥수수 하나를 건네주신다.
"이것 좀 먹어봐라. 가뭄 들어 잘되진 않았지만
그중 튼실한 놈이다."
가장 튼실한 놈이라고 골라주셨지만,
듬성듬성 난 옥수수 알이 마치 할머님의 치아 같았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항상 따뜻했고, 그 따뜻함 속에서 자라났다.
어른이 되었고, 바쁜 생활 속에서 할머니와의 시간을 점점 잃어갔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마주한 그 순간, 할머니와 나누었던 소중한 시간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병실에 앉아 있던 그날 밤,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 저 잘 지내고 있어요. 직장도 얻었고, 할머니가 늘 자랑스러워하시던 그 모습 그대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래서 너무 늦게 찾아온 것 같아요. 할머니가 이 말을 들으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없었다면 저는 이렇게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고 계신 할머니에게 내 마음을 전하던 중, 할머니가 잠시 숨을 고르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할머니가 내 손을 살짝 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작은 신호에 모든 감사와 사랑을 느꼈다.
그날 밤,
할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병실은 적막 속에 잠겨 있었고,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할머니가 나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삶과 그분의 사랑이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당신께서 나를 위해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할머니는 생전에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늘 소박한 삶을 추구하셨기에 가족 모두 그 뜻을 존중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할머니가 늘 가꾸시던 작은 꽃밭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할머니가 손수 가꾼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 꽃들 사이에서 할머니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을 맞으며,
종종 할머니의 산소를 찾았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믿었다.
이제 가을이 깊어지면,
여전히 할머니를 기억하며 당신의 사랑을 되새긴다.
할머니에게 받은 따뜻함을 나 또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할머니께 드릴 수 있는 나의 작은 감사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어린 시절 건네 주셨던
튼실한
그러나
성근 옥수수알을 떠올린다.
올가을엔
할머니 치아 닮은
옥수수 몇 자루 삶아
묘소를 찾으리라.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