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20. 2024
■
침묵의 호수
장 화백
눈을 뜨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귀를 열어야
기필코 들리는
소리는
의지와
의식과는
관계없이도
이미 침묵으로
가득 찬 빛의 호수 안에 있다.
창호지 한 장으로
가리어진
의식의 문은
스스로 닫지 않으니
모든 대상을
어우른
조화로운 음악이 되어
바람처럼 흣날린다.
새벽은
고요한 시간의
대명사처럼
기대찬 기운으로
빛을 기다리며,
희미하게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과
잎새 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은
시리기만 하다.
지나 보면
쉽게 그려지는
일상의 흔적들.
허망하기만 한
반복되고
연속적인
누적된 경험들은
남은 시간을
가늠하는데
보석 같은 지혜로
제공되지만
삶은
주어진 인연의 시공을 넘어서지
못한다.
허무를 등에 지고
걸어온 시간들은
한 장의 그림과
명곡 하나와
산책길 이름 모를
들꽃의 눈마중으로
보상받는다.
이 시간들은
여전히 수평적 의지의 기대와는
무관한
공간의 인연에 기대선
숨 막히는 흐름일 뿐이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장 화백의 글은 단순한 언어로 무한한 깊이를 담아내며, 삶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그의 투병 생활과 시한부의 삶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문장은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착하며, 허무와 충만의 경계를 섬세하게 탐험한다.
우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라본 화백의 관점은 인상적이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기필코 들리는 소리"는 삶의 본질을 깨닫기 위한 의지적 노력과 직관적 깨달음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는 삶이 단순한 의지나 의식만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침묵으로 가득 찬 "빛의 호수"라는 초월적 공간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는 그의 예술과 철학이 삶의 물리적 조건을 넘어서 영적인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의 중반부에서, 그는 일상적 경험의 반복성과 그 속에 감추어진 지혜를 드러낸다. "허망하기만 한 반복되고 연속적인 누적된 경험"이라는 구절은 겉보기에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이 사실은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임을 역설적으로 암시한다.
특히, 이러한 경험들이 "보석 같은 지혜"로 남겨진다는 표현은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화백의 긍정적 태도를 반영한다.
후반부에서는 그의 미학적 감수성이 드러난다. "한 장의 그림", "명곡 하나", "들꽃의 눈마중"은 그의 예술 세계를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예술적 창작과 자연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고통이 보상받는다는 그의 믿음은, 그가 예술을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닌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도구로 여긴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수평적 의지의 기대와는 무관한 공간의 인연"이라는 표현은 그의 세계관에서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의 가치를 강조하며, 삶의 다양한 관계와 맥락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과 진리를 드러낸다.
장 화백의 글은 그의 철학과 예술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다. 그는 삶의 무상함 속에서도 미적 감각과 철학적 통찰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그의 글은 단순한 감정적 기록이 아니라, 예술과 철학이 결합된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성찰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은 그의 작품 세계와 일관된 미의식을 보여주며, 독자로 삶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도록 이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