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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선생, 그 고귀한 인연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Mar 20. 2025











          백결선생, 그 고귀한 인연



                                         김왕식





학창 시절, 오직 한 분의 스승만을 섬겼다. 허만길 선생님. 그분은 단순한 교사가 아닌, 한 시대의 정신을 품고 살아온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천재라 불릴 만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그보다 더 빛난 것은 그의 인간됨이었다. 선생님은 최연소 교사로 기네스북에 오른 분이었다. 스승보다 나이가 많은 제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나 신분을 초월한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경복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1970년대, 나라 전체가 새마을운동으로 들끓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그 흐름 속에서도 문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는 길을 걸으셨다. 한결같이 검소한 차림새, 한 벌의 양복을 사계절 내내 입으며 소매와 호주머니를 꿰매어 입던 모습은 그야말로 ‘백결선생’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그것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였다. 박봉 속에서도 가족을 부양하고, 제자들에게까지 온정을 베푸는 삶. 그에게 화려한 옷이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가르침이었다.

수업 시간은 언제나 정성으로 가득 찼다. 글 한 줄, 문장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넣듯 가르치셨다. 시간은 늘 초과되었고, 학생들은 쉬는 시간조차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다 보면 시간의 흐름 따위는 무의미해졌다. 차라리 더 길어지기를 바랐다. 단 10분의 여유조차 아쉬웠다.

제자 사랑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 방통고 학생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학문의 길로 인도하며, 삶의 등불이 되어주었다. 선생님을 거쳐 간 수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그를 ‘큰 스승’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다. 나에게 유일한 스승은 허만길 선생님뿐이다.

그의 가르침은 문학이라는 길을 안내하는 빛과 같았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나 또한 시와 수필, 그리고 평론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은 선생님 앞에서 허망한 말일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선생님의 덕망과 고귀한 인품, 탁월한 문필력을 따라갈 수 없다. 그분은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가르치는 분이었다.

그런 선생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정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도서출판 청람서루를 설립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난초를 보내주셨다. 그것은 단순한 화분이 아니었다. 문학의 향기를 담은 선물, 그리고 변치 않는 스승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오늘, 영등포여고 출신의 두 문인을 내 연구소로 보내어 축하 인사를 전하게 하셨다. 그들은 식사를 대접해 주고, 금일봉까지 남기고 갔다. 선생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문득 부끄러움을 느낀다. 선생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그분의 헌신, 제자를 향한 끝없는 애정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미흡한 제자일 뿐이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 문학이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임을 깊이 새기며, 나 또한 선생님처럼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허만길 선생님. 백결선생이라 불리던 그분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다. 단벌 양복을 입고 교단에 서서, 제자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마주하던 모습. 그 한마디 한마디가, 한 글자 한 글자가 지금도 가슴속에 남아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시간 속에 묻히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처럼, 영원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백결의 스승



한 벌 양복에 꿰맨 소매
시간을 잊은 채 흐르던 강의
문장마다 피어난 푸른 향기
쉬는 시간마저 넘친 가르침
제자들의 눈에 새긴 별빛

책장 사이로 스미는 바람
묵은 종이 향처럼 깊어진 음성
낡은 분필 끝에 남겨진 길
한 글자 한 글자 새긴 정성
가르침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

백결의 손끝에서 자란 문장
한낮의 하늘처럼 투명한 진실
묵묵히 걸어간 발자국 뒤로
문학의 길을 밝혀준 등불
글이 아닌 삶으로 새겨진 글

난초 한 송이 건넨 마음
향기처럼 전해지는 스승의 뜻
한 마디 말로 이어진 인연
손끝에 남은 따스한 온기
시간을 넘어 뿌리내린 가르침

무너지는 벽을 세우는 글
사라지는 길을 잇는 언어
스승의 손에서 피어난 마음
제자들의 가슴에 남은 불꽃
별이 되어 빛나는 한마디, 스승



청람




나의 스승 허만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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